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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165회 [2부] 86화. 또다른 가능성의 나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7.21 | 회차평점 0 0

 

 

 

몹시도 시끄러운 하루였다. 사이렌 소리의 울림, 여기저기 낭자한 혈투의 잔해, 훼손된 시설들과 체포되는 사람들, 부상자들의 운반,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그래도 일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고 모든 것은 바로잡혔다. 리키는 옥상에서 그 모든 장면을 바라보며 차분히 심장을 진정시켰다.

 

 

“허무한 결말이네.”

 

 

폭도들은 한 명도 도망치지 못하고 체포되었다. 관련자들과 공범들도 잇달아서 연행되었다. 상당수가 자기들끼리 충돌을 벌이다가 다치거나 드물게는 죽었고 경찰이나 선량한 시민 측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만일을 대비하여 치안 유지군까지 개입했는데 너무도 확실하게 정리된 덕에 불필요한 지원이 되었다.

 

 

뉴스를 보니 이곳만의 일은 아닌 듯했다. 오대양 육대주의 지구 전체를 아우르는 브리튼령 전역에서 엄청난 수의 범죄자들이 체포되었다. 수천만 명을 한번에 진압하였던 몇 년 전의 이슬람 내전을 제외하면 근래 들어 일어난 범죄 소탕 작전 중 최대 규모였다.

 

 

더욱이 이슬람 소동 때는 대부분의 테러리스트들이 사회 하위 계층이었다면 이번에는 너무도 많은 사회 지도층 또는 주요 역할을 담당하는 지도자들이 가담자 중에 포함되었다. 그들 중 누구도 사면을 받지 못하리라. 대외적으로 알려진 이들은 물론이고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았던 비밀스러운 실세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적발되어 백주대낮에 끌려나와 세상 앞에 전시되었다.

 

 

이들이 계획한 범죄들이 하나같이 국가 전복 시도에 준하는 것들이므로 즉결 처분의 명분도 부족지 않았다. 아울러 이제는 숨은 범죄 목록까지 적발될 테니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되리라. 새로 창안된 법률들에 근거하면 이들이 내란에 더해 초자연적인 능력에 깃대어 국가를 무너뜨리려 한 죄목이 인정되면 아무도 바깥 세상을 보지 못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형님께서 안배해두신 것들이 아니었더라면 안정적인 승리를 취하진 못했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의 공로는 인정치 않을 수 없었다. 세르빈도, 유타도, 엘리어트도, 에쉬튼과 랜슨도,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형의 부재에도 흔들리지 않고 그가 돌아올 옥좌를 반듯이 닦아 예비해주었다. 부러움에 은근한 질투심도 들었다. 자신도 저렇게 형님께 유익이 되는 인간이었으면 좋으련만.

 

 

 

 

 

“리키.”

 

 

야경과 별빛을 바라보던 중 익숙한 음성이 귓가를 간질였다.

 

 

“설마?”

 

 

진정되었던 심장이 다시 격하게 두근거렸다. 이번에는 갑작스러운 반가움으로 인한 들뜸이었다. 리키는 황급히 몸을 돌려 뒤편을 보았다. 환자복을 입은 장신의 남성이 곧은 자세로 선 채 자신을 마주하고 있었다. 깊은 잠에서 막 일어나 영 단정한 몰골은 아니었지만 건장한 풍채와 강인한 기개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은 감춰지지 않았다. 남자는 온화하게 안정된 표정으로 옅게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이네. 내게는 너무도 긴 시간이었어. 이곳 시간으로는 얼마만큼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순간적으로 리키는 울컥하여 목이 꽉 메였다. 속에서 용솟음치는 듯한 복합적인 감정에 엄몰되었다. 서러움, 고마움, 해방감과 안도감, 그리고 원망감까지. 하나로 정의하기 어려운 정서의 혼합물로 인해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무언가 대답을 해야 하는데 혀와 입술이 엉킨 듯하여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에 뜨거워진 것은 눈시울이었다. 아이가 어머니의 손을 놓친 채 사람들 틈을 헤매며 울다가 마침내 그 손의 온기를 다시 발견했을 때 느끼는 기분. 그 충격의 배 이상이 한꺼번에 자신을 휘감는 듯했다.

 

 

“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

 

 

알렉시스가 말을 더 할 틈도 없이 동생의 몸이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 꽉 안은 팔과 손에는 정말로 힘이 세게 실려있었다. 이번에는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간절함이 담긴 듯한 포옹이었다. 손을 놓아 버리면 혹여 어디론가 날아갈 것 같은 무서움에 리키는 한참을 붙잡은 채 품을 놓아주지 않았다.

 

 

“울지마.”

 

 

동생에게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에 형의 환자복 어깨 부분이 젖었다. 알렉시스는 막냇동생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의 의미로 살포시 포옹으로 맞대응해주었다.

 

 

“무서웠어요.”

 

 

“잘 이겨냈잖아.”

 

 

“내란 이야기가 아니예요. 그런 건 아무래도 무섭지 않아요. 형님이 사라질까봐 두려웠어요. 나한테 유일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우리 모두가 너를 가족으로 생각해. 넌 모두에게 사랑받는 아이니까.”

 

 

알렉시스는 한참을 자신의 넓고 단단한 품에서 나오는 온기로 아이를 위로한 뒤 칭찬의 뜻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난 절대로 너희를 두고 어디로 떠나지 않아. 허무하게 패배하는 일도 없어. 나는 너희와 약속했으니까.”

 

 

어린 시절 이미 하나님 앞에서 서약했다. 브라이틀란트 가문의 차기 가주로서, 아니 한 명의 인간으로서, 형제들과 가족들을 보호하겠노라고. 이것은 여전히 유효한 서약이었으며 언약 속에 함유된 보조 조약이다. 아울러 알렉시스 개인의 신념이기도 하다. 리키도 엄연히 그의 울타리에 포함되는 사람이다. 그러니 결코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

 

 

 

 

 

알렉시스가 어찌나 인기척 없이 은밀히 병실 밖으로 나왔는지 그를 비밀리에 경호하던 이들도 그의 자취를 놓친 것을 알고는 당황하였다. 처음에는 침대가 빈 상태로 있는 것을 발견하고 문제라도 발생한 줄 알고 모두가 난리법석을 떨었다. 나중에야 그들은 동생과 함께 멀쩡히 걸어다니는 황태자를 발견하고는 안도하였다.

 

 

“전하, 몸은 무사하십니까?”

 

 

“깨어나셨군요.”

 

 

강인해보이는 사냥개의 인상을 가진 것과 달리 의외로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그들이었다. 감격하며 울먹이는 그들을 간신히 달랜 뒤 알렉시스는 당분간 동생의 간호만 있어도 될 것 같다고 말하며 일하는 사람들을 물렸다.

 

 

“형님, 어지럽거나 힘이 빠진다거나, 다른 불편한 증상은 없으세요?”

 

 

“아직은 크게 불편하진 않아. 오래 누워있던 여파인지 컨디션은 좋지 않네. 기운도 조금 부족하고.”

 

 

워낙에 건강한 몸이라 그런지 기력은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한창 최상의 상태로 관리하던 평소에 비하면 근육량이 조금 빠지고 얼굴도 약간 수척해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몸은 강철처럼, 태산처럼 강인했다.

 

 

잠시 후, 주치의들이 그의 몸 상태를 점검하였고 특별한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였다. 휴식과 영양 섭취만 적절히 하면 오늘 안으로 퇴원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리키는 그래도 염려가 가시지 않았는지 주치의들이 떠난 뒤로도 자신이 직접 형을 문진하며 모든 불편한 부분들을 확인해주었다.

 

 

 

 

 

“오늘은 아무 일도 하지 말고 푹 쉬셔야 해요.”

 

 

동생의 권고에 알렉시스는 속으로 뜨끔하였다. 사실 그는 밀린 일을 당장 처리하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들키지 않기 위해 그는 표정을 관리하였다.

 

 

“그나저나 날짜가 벌써 1월 1일이네.”

 

 

“네, 거의 한 달 가까이 누워계셨어요.”

 

 

“한달이라. 열일곱살 때보다 더 오래 갇혀 있었군. 이런 일이 또 벌어지면 안 될 텐데.”

 

 

알렉시스의 표정이 깊은 수심에 잠겼다. 리키는 혹시라도 ‘내란’에 관한 소식이 형님의 귀에 들어갈까봐 매우 조마조마한 상태였다. 그야 조만간 알게 되긴 하겠지만 적어도 그때가 하루 정도는 유보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었다. 형님 특성상 그런 일을 그냥 놔두시진 않을텐데, 그 고민으로 정신적 휴식을 얻지 못하면 병이 도지게 될까봐 매우 걱정되었다. 다행히 눈치는 있었는지 보좌하고 돕는 이들 모두가 합의라도 한 듯 태연스레 입을 맞춰 함구하였다.

 

 

병실에서 알렉시스는 동생과 겸상하며 오랫동안 비워진 배를 채웠다. 당장은 단단한 음식 대신 수프와 잘게 썬 채소들을 먹어야 했다. 알렉시스는 몹시 배고픈 상태일 텐데도 침착하게 속도를 조절하며 천천히 씹어 음식물을 넘겼다. 동생은 그의 말동무가 되어주며 그간 터놓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꺼냈다. 마치 오랜 죽마고우가 만난 것처럼 편안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워낙 높은 분이라 편히 대하지 못해던 형님이었건만, 이번 일을 계기로 더욱 친근하고 막역해진 기분이었다.

 

 

기력을 회복된 뒤 옥상 테라스에서 산책을 하며 기분을 풀었다. 이후 리키는 큰형이 피로를 씻어내도록 목욕을 도와주었다. 아직 힘이 거의 풀린 상태라 혼자서는 씻기가 불편한 듯했다. 한달 간 잠들어 제대로 된 샤워도 하지 못했던터라 말끔하게 땀을 씻어내는 따스한 물이 몹시 상쾌하게 느껴졌다.

 

 

“고마워. 형 수발하느라 괜히 고생이 많네.”

 

 

“제가 기뻐서 하는 일인걸요.”

 

 

간단하게 샤워를 마친 뒤 욕조에 같이 들어간 두 사람. 둘은 한 동안 헤어져 한이라도 맺힌 것인지 쉬지 않고 즐거운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러다 어느덧 그 주제는 리키가 몹시 궁금해하는 부분으로 다가갔다.

 

 

“형님.”

 

 

“왜?”

 

 

“외람된 질문이지만, 그, 형님께서는 잠든 동안 무엇을 보셨던 것인지요?”

 

 

나름 조심스런 접근이었다. 그럼에도 알렉시스는 순간적으로 흠칫하며 긴장하는 반응을 숨기지 못했다. 우애가 깊은 형제끼리 나누는 사적인 대화와 달리, 이것은 어찌 표현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주제였다.

 

 

꿈도 아니고 그렇고 이상도 아니며, 확실한 초자연적 체험도 아닌데 그렇다고 현실인지 가상인지, 아니면 또다른 현실들끼리의 겹침인지, 증명이나 이해조차 할 수 없는 어려운 경험. 이것은 가장 가까운 형제들끼리도 감히 터놓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정말로 언어로 형용하기가 어려웠다.

 

 

“그게 말이지.”

 

 

역시나 예상대로 심상치 않은 일이었나보다. 알렉시스의 표정이 당황과 고민으로 굳는 것을 본 리키는 재빨리 손을 저었다.

 

 

“죄송해요. 불편한 경험이라면 말씀해주시지 않으셔도 좋아요.”

 

 

“그래. 이건 아무래도 나 혼자만 알아야 할 것 같은 비밀이네.”

 

 

사도 바울이 가사 체험으로 셋째 하늘에 올라갔을 때 그는 엄청난 것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발설하지 못하도록 금제의 법률에 놓였다. 그것과는 다르지만 알렉시스도 뇌 속에서 느껴지는 어떤 압박감으로 인해 자신의 기억을 감히 꺼내놓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일단 생생하게 기억되는 실체로서의 체험이다. 모호한 꿈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런데 무언가에 묶인 듯 입이 다물어졌다. 조종당하는 건 아닌데 영혼 속에서 흘러나오는 긴장감과 경외감이 그의 마음을 경솔한 발설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제어하였다.

 

 

‘그때 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그의 기억은 자신이 결정적으로 탈출의 열쇠를 얻은 그 순간으로 향했다.

 

 

 

 

 

 

 

 

 

 

 

*

 

 

 

 

 

난해한 꿈 속 세계에서 있었던 일에 알렉시스의 회상이 이르렀다.

 

 

얼마나 한참을 보이지 않는 ‘존재성 규정의 사슬’에 결박된 채로 있었을까. 이제는 그의 기억마저도 희미해졌다. 자아가 서서히 융화되며 인격의 경계선이 흐려지고 있었다. 기이한 시공간 속에서 그의 인내는 시간 너머의 시간 속에 녹아들어 희미해져갔다.

 

 

어느 경점에 이르렀을 때 그는 이상한 깨우침을 발견했다. 평소에 그가 하던 중요한 사고 활동 중 하나를 그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전혀 시행하지 않고 있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틀림없이 이건 꿈이 아니리라. 의식, 무의식, 초의식 모두가 매우 선명한 상태이며 자의식, 양심, 상상력, 추리력 등 모든 정신 기능이 평소 이상으로 짙게 작동하였다. 감정도 느낄 수 있고 의지도 발산된다.

 

 

그런데 왜일까, 왜 늘 습관처럼 해오던 ‘기도’가 전혀 나오지 않고 있었다. 이상한 영역 속으로 들어온 그 순간부터 그는 기도를 중지한 상태였다. 심지어 자신이 기도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조차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바로 이 점을 깨달은 순간이 변곡점이 되었다. 그 순간, 어떤 균열이 발생했다. 합쳐지던 자아가 분열되며 자와 타의 경계선이 다시 나뉘었다.

 

 

“알렉시스.”

 

 

“난 누구지?”

 

 

알렉시스의 각성에 그 공간의 주인인 갈색머리 사내는 몹시 불쾌하게 여겼다.

 

 

“누구긴. 너는 나다. 나는 너고. 너의 존재는 나의 존재의 일부다, 알렉시스.”

 

 

“네 말을 어떻게 증명하지?”

 

 

“증명할 필요조차 없어. 현실을 보아라. 너와 나의 존재성의 연속성을 직시해라. 네 초의식도 지금 선명하게 증언하고 있지 않나? 네 영혼과 본능이 알 텐데.”

 

 

그 설득의 말은 매우 강력한 마법처럼 작동하였다. 알렉시스의 정신 세계에 권능을 주입하여 저절로 진실을 이해케 해주었다. 최면과는 달랐다. 그 근원은 경계를 허무는 힘이요 어떤 존재를 자기 뿌리 속으로 회귀시키려는 본능이었다. 알렉시스는 자신과 사내 사이에 정말로 어떤 ‘필연성’의 연결이 존재하며 그것이 엄연한 현실임을 자각해다.

 

 

그러나 기도를 해봐야겠다는 마음이 그 강력한 설득의 마법에 저항하며 도전을 제기했다. 만일 이 시도가 없었더라면 알렉시스의 자아는 정말로 갈색머리 사내에게 흡수되어 섞인 물감처럼 개별성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질문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번에 알렉시스가 말을 건 대상은 갈색머리 사내가 아니었다. 사실 그의 대화는 이곳에 온 뒤로 내내 그 사내의 틀 안에 갇힌 상태였다. 그래서 다른 존재와는 아예 대화하지 못했고 오직 자아 연속성을 가진 그 사내와만 대화할 수 있도록 강제된 상태였다. 그러나 알렉시스는 그 규율을 마침내 깨트렸다.

 

 

“다른 존재는 여기에 없어, 알렉시스.”

 

 

“저에게 답변해주세요.”

 

 

사내의 말을 무시한 채 알렉시스는 허공 위로 말하였다.

 

 

“당신께서는 시간이든, 공간이든, 허상이든 초월계든, 어디든 동일하게 존재하시는 분이잖습니까. 그러니 제게도 말씀으로 응답해주세요.”

 

 

잠잠했던 백색 공간에 조금씩 균열이 발생했다.

 

 

“저는 누구입니까?”

 

 

고요한 파동이 번지듯 그 균열의 파동은 더욱 넓게 확산되었다.

 

 

“저 남자가 정말로 제 존재성의 본체입니까? 아니면 제 정체성은 다른 방식으로 정의됩니까?”

 

 

알렉시스는 자신을 세뇌하던 필연적 견인력을 판벽하고자 그것을 더 높은 판단의 권위 앞에 상납하여 심판의 도마 위에 올리고자 했다. 사내의 말이 참인지, 혹은 거짓인지를 알아보리라.

 

 

‘아니, 이미 답은 알고 있다.’

 

 

안타깝지만 사내의 말은 참이다. 알렉시스 내면의 본능이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자신은 어쩌면 정말로 저 존재와 연결되었으리라. 그러나 재판의 결과가 자신을 유죄에 묶어둔다고 할지라도 더 높은 심판자가 결말을 바꾸어 다른 결론을 선포한다면 현실은 바뀔 수 있겠지.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인간들을 무죄라고 선포하실 수 있는 분이다.’

 

 

신께 그럴 권능이 있을진대, 곧 ‘죄인을 하늘의 법정에서 영원한 무죄로 선고하시고도 자기 자신의 재판관으로서의 의로움을 유지하실 수 있을’진대, 자신의 존재를 ‘다른 것’이라고 재정의해주실 수도 있겠지.

 

 

“저에게 대답해주세요, 주님.”

 

 

그러자 균열 너머로 세미하게 빛이 스며들었다. 물질로 된 빛이 아닌, 영광으로 이뤄진 어떤 현상이었다.

 

 

 

 

 

[너는 내가 창조한 자, 그러므로 너는 새 피조물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노라.

 

 

마치 고등법관이 내린 판결을 대법관이 뒤집듯, 차원 너머에서 역전 현상이 발생하였다. 알렉시스을 끌어들인 그 남자의 말은 분명 옳은 명제였다. 그러나 그것은 ‘옛 사람으로서의 알렉시스’에만 국한된 이야기. 그 남자의 존재성과 알렉시스의 ‘자연적 본성으로서의 존재성’, 둘은 분명 연속체가 맞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새 본성’은 다르다.

 

 

이것을 자각한 순간 균열은 확정적인 분열로 이어졌다.

 

 

 

 

 

파치이이이잉.

 

 

 

 

 

무한한 거울들의 공간이 산산이 깨어지며 흐드러졌다. 하나로 융화되었던 존재의 두 눈이 다른 의지를 머금고 각성하였다. 알렉시스의 자아가 선명하게 남자와 나뉘어 분열되었다.

 

 

“너.”

 

 

갈색머리 사내는 불쾌해하였다.

 

 

“나는 네가 아니야.”

 

 

의지를 결연히 굳힌 알렉시스는 몸을 일으켰다. 그의 의지가 투영되자 합쳐졌던 둘의 몸도 다시 원래대로 둘이 되었다. 이제 알렉시스와 갈색머리 남자 사이에는 하나의 거울만이 남았다. 마치 거울 너머로 자신의 모습을 보듯, 한쪽 공간에는 적갈색 머리의 알렉시스가, 다른 쪽 공간에는 상대방이 마주하였다.

 

 

 

 

 

“네 저항은 무의미해, 알렉시스.”

 

 

남자는 여전히 여유로이 웃으며 상대를 깔보았다.

 

 

“이미 내 속에는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의 ‘너’들이 들어있다. 그들은 모두 내 존재의 씨앗을 이루는 근간 중 하나가 되었다. 나는 마땅히 취해야 할 ‘너’들을 회수하러 이곳에 왔을 뿐이야.”

 

 

“네가 말한 그 ‘나’들이란, 구원 받지 않은 ‘옛 사람’으로서의 ‘나’들이겠지.”

 

 

한 인간의 삶이 정말로 평행우주처럼 다양하게 분지될까? 이번에 저 사내를 만남으로써 알렉시스는 이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만일 그렇다면 ‘무수히 다양한 가능성’으로서의 ‘알렉시스’들도 여러 평행우주들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 가운데는 지금의 자신처럼 하나님을 통해 새롭게 창조된 경우의 수들도 있을 터이고, 그렇지 못한 경우들도 있으리라.

 

 

저 남자는 ‘옛 사람’으로서의 ‘알렉시스’들에 대해서는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새 사람’으로 거듭난 ‘알렉시스’들에게는 손을 대지 못한다. 이것을 발견한 지금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이젠 알겠어.”

 

 

사내와의 접속을 통해 그의 기억들을 일부나마 보게 되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리고 그 결말은 어떻게 되었는지조차도. 아마 저 사내는 삶의 끝자락에서 시간축을 건너 시간을 역행한 뒤 평행 세계의 ‘또 다른 가능성’들을 수색하러 이곳에 강림한 것이리라. 자신의 뿌리가 되었던 원소들을 회수하려는 것일테지.

 

 

“너에게서 분명히 보았어.”

 

 

알렉시스는 사내가 살아온 삶을 교감하는 과정에서 깊은 슬픔을 느꼈다. 자신의 인생과 많은 부분에서 닮아있었다. 그러나 그 결말은 회한과 쓰라림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고도 아무것도 쥐지 못한 자. 이것은 어쩌면 자신이 그려내었을 수도 있는 또 하나의 가능성이리라.

 

 

“내가 만일 하나님을 알게 되지 않고 그 대신으로 더 큰 힘을 얻었을 경우에 너와 비슷한 인생길을 걷게 되었을지도 모르지. 넌 내가 될 수도 있었던, 그러나 되지 않았던, 또 하나의 가능성.”

 

 

초인.

 

 

인간을 벗어난 존재.

 

 

알렉시스는 그 경지에 한없이 근접하였으나 끝내 그 너머에 다다르지는 못했다. 그와 그의 피 속에 새겨진 ‘언약’은 하나님을 생각하여 그 경계선을 넘지 않기로 택했다. 반면에 사내는 그 선을 넘어버린 존재였다.

 

 

“건방지구나.”

 

 

사내의 입가에 오만한 미소가 번졌다. 그 위압감에 알렉시스는 움츠렸다.

 

 

“넌 나를 절대로 이기지 못해, 알렉시스.”

 

 

그 말은 허언이 아닌 진실이었다. 이 영역에서는 진실과 거짓의 경계선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알렉시스도 이를 피부로 체감했다.

 

 

“너는 나와 동격이 아니야. 나와 너는 평행적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관계는 직렬 연결에 가깝지. 너와 ‘그’는, 그리고 무수한 가능성의 ‘너’들과 ‘그’들은 나를 창조하기 위해 소모된 씨앗들에 불과하다.”

 

 

아마도 사내는 알렉시스의 자존심을 짓뭉개기 위해 그렇게 말했으리라. 그러나 알렉시스는 여기에 무너지지 않았다.

 

 

“알아. 그래서 뭐. 그건 ‘옛 사람으로서의 나’에게만 해당되는 말이잖아.”

 

 

갈색머리 사내가 내민 제안의 손을 알렉시스는 단호하게 뿌리치며 선포했다.

 

 

“이만 헤어지자. 너와는 영원히 결별이다. 난 내 세상에 남겠어.”

 

 

이 선포 위에 신적인 동의가 더해지자 마침내 영역은 두 동강이 나 분열되었다. 낙원과 음부 사이에 커다란 구렁텅이가 있듯, 이제 갈색머리 사내와 알렉시스 사이에 크레바스가 만들어졌다.

 

 

“유일하게 내 손아귀에서 벗어난 한 가지 ‘경우의 수’인가.”

 

 

사내는 작게 중얼거렸다.

 

 

“신기하군. 모든 ‘알렉시스’들과 그 ‘세계’들을 기어코 내 손으로 취해냈거늘, 저 세계만은 기어코 운명의 올가미에서 달아나는 데 성공했군.”

 

 

멀어져가는 두 존재. 알렉시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또다른 자아와도 같은 그 ‘존재의 연속선’을 향해 작별하였다.

 

 

“만나서 반가웠다. 하지만 다시는 보지 않게 되겠지.”

 

 

그리고 떠나는 김에 이번에는 상대를 이름으로 불러주기로 마음 먹었다. 저자는 자신과 알렉시스의 존재 경계를 허물려 했고 인격 통합을 시도했다. 그 뜻은 실패하였다. 자신은 자신의 이름으로, 저자는 저자의 이름으로 불리리라. 다시는 그 경계선이 흐려지는 일이 없으리라.

 

 

“안녕, 카르테니온.”

 

 

“…….”

 

 

갈색머리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모든 것이 확실히 정리되었다고 생각한 순간, 한 가지 반전이 마지막으로 엄습하였다.

 

 

<<<<<<<“그래, 마침 재밌군. ‘다시 태어난 영혼’이라. 초대째의 영혼을 매개로는 역부족인가. 그럼 이 몸이 직접 나서주마.”>>>>>>>

 

 

공간 전체가 얼어붙으며 거대한 아우라가 모든 법칙과 규율을 기괴하게 뒤틀었다. 알렉시스는 난생 처음으로 감당할 수 없는 막대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자신과는 격 자체가 다른 비대한 존재, 무언가 형언하지 못할 상식 너머의 괴랄함이 거대한 벽처럼 존재감을 드리우고 있었다.

 

 

‘뭐, 뭐지?’

 

 

그 괴이의 존재감은 한 순간에 구렁텅이를 넘었다. 이내 카르테니온이라는 이름의 갈색머리 사내의 심장에서 검은색 블랙홀 같은 문이 만들어지더니 거대한 연기같으면서 찬란한 섬광과도 같은 어떤 존재가 그 안에서 방출되어 알렉시스에게로 접근했다.

 

 

<<<<<<<“난 늘 궁금했거든. 성령으로 거듭난 영혼을 신의 손아귀에서 빼앗을 수 있을지. 이전의 나라면 어림도 없었겠지만, 두 번의 ‘합일’을 겹침으로써 재탄생된 나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우주적 공포감 속에 마비된 상태로도 알렉시스의 영은 치열하게 사고하며 고민하고 사색하였다.

 

 

‘힐렐? 아니다, 이건…….’

 

 

본질은 매우 비슷하다. 그러나 존재의 차원이 달랐다. 마치 수백, 수천, 수억, 아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힐렐들, 무한한 수의 힐렐들이 하나의 강한 축퇴로에서 뭉쳐 핵융합을 일으킨 뒤 완전히 새로운 격으로서 재탄생한 듯한 존재였다.

 

 

<<<<<<<“네게 속한 ‘신의 언약’도 내 양분으로 탈취해주마.”>>>>>>>

 

 

알렉시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승산이 없는 격차였다.

 

 

바로 그때 그의 심장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나왔다. 눈을 들어보니 자신의 혼에서 나온 어떤 은은한 온기가 방패를 형성한 것이 아닌가. 괴이의 존재가 뻗은 손은 그 방패 앞에 가로막혔다.

 

 

[거기까지.]

 

 

<<<<<<<“쳇.”>>>>>>>

 

 

거악(巨惡)은 아직은 자기 숙적을 능가하기에는 진화(進化)가 부족했다고 판단한 모양인지 순순히 한 발 물러섰다. 그것은 다시 갈색머리 사내에게서 만들어진 포탈 너머로 되돌아갔다. 다시금 알렉시스와 사내 사이의 거리는 멀어졌다. 상상을 초월한 악의 권능과 그것을 능가하는 신적 권능, 두 거대한 능력의 충돌의 여파에 휘말린 탓인지 알렉시스의 연약한 의식은 깊은 잠에 잠겼다.

 

 

잠시 뒤, 알렉시스의 혼은 병실에 누여진 자신의 몸에서 깨어났다.

 

 

여기까지가 그의 기억하는 체험의 전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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