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168회 [2부] 89화. 사악한 자의 씨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7.30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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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된 좌표에 도착한 알렉시스는 차분히 주변을 살폈다. 그는 어떤 이에게도 자신이 이곳으로 향했음을 알리지 않았다.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었다. 상대가 내세운 인질에 대해 어떤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명쾌하게 드러나기 전에는 불필요한 소문이나 잡음이 일길 원치 않았다. 그랬기에 최대한 조용히 혼자서 해결해기로 정했다. 그런 이유로 부하들은 물론 비블로스에게마저도 행차를 비밀로 했다.
“어리석고 무모한 선택이려나?”
예전 같았으면 책임감 때문에 불안해했겠지. 황태자로서 자기 몸의 건사함도 중요한 문제지만 이루고 싶은 목표들이 워낙 많이 남았기에 모험에 뛰어들기에는 삶에 미련이 많았다. 당장 자신이 사라진 세상이 어떻게 될지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도 많았고.
하지만 꿈 속에 갇혀 기묘한 체험을 한 후 삶의 태도가 달라졌다. 더는 본인의 삶과 죽음에 대한 미련에 연연치 않게 되었다. 심지어 자신이 뜻하지 않게 세상을 떠난 뒤에 남겨진 자들이 어떻게 될지에 대한 두려움도 많이 극복했다. 이것은 그가 자신보다 무한히 더 큰 존재의 손길을 체험적으로 알게 된 영향이었다.
알렉시스는 담대히 통로 속으로 진입했다. 호위도 없이, 아무런 무장도 없이, 심지어 모든 전자기기를 내려놓은 채. 이 약속 장소는 내부의 그 어떤 전자적 작용도 허락하지 않는 성역(聖域)이다. 말하자면 악마의 성역(Devil’s sanctuary), 모순적인 곳이다. 이 안에 어떤 외부의 전자 상호작용이라도 침투 시 공간 전체가 함몰되어 자폭을 일으키도록 설정되어 있다. 잠정적인 폭약으로 덧칠되어 에워싸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죽음의 덫이다. 황태자인 알렉시스가 이곳에 발을 들이미는 것은 객관적으로 보건대 결코 현명한 선택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일부러 적의 속임수의 덫에 걸려주기로 정했다. 비무장에 모든 통신으로부터 단절된 상태인 그가 지하 통로 안에 몸을 들이밀자마자 노골적으로 덫이 작동하였다. 그가 지나온 뒤편의 모든 문들이 차례로 잠금되었다. 단순한 자물쇠가 아닌, 비가역적인 영구적 폐쇄였다. 억지로 물리력을 써서 구멍을 뚫으려 하면 즉각 벙커 전체가 폭발하게 된다. 부비트랩을 예상했던 알렉시스는 아주 미약한 경멸감만을 얼굴 위로 비친 뒤 두려움 없이 태연히 앞으로 직행했다.
“비정상적인 공포감의 노예가 되었군. 죄 짓고 살면 안 된다는 걸 실감나게 보여주는 학습 도감인가.”
여유로이 알렉시스는 정해진 방향대로 지하의 길들을 통과하였다. 마침내 아지트 요새의 심장부에 도달했을 때 마지막 문 너머로 옅은 빛이 새어나왔다. 두려움 없이 문 너머로 이동하였다. 광활한 다층의 강당형 내실이 그를 맞이하였다. 콜로세움만큼이나 넓었다. 족히 지름만 이백 미터를 넘을 듯했다.
“흐음.”
“귀하신 분께서 이곳까지 행차해주셨군요.”
낯익은 목소리에 알렉시스의 미간이 주름지어졌다. 그는 냉담한 눈빛으로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두세 층 정도 위에 위치한 커다란 발코니에서 한 인영이 나타났다. 알렉시스가 잘 아는 얼굴, 젊을 적에는 꽤 곱상했을 것으로 보이는 귀족다운 기품의 60대 초반의 남자. 그는 공손히 고개를 숙여서 예를 표하였다. 가증한 그 위선에 알렉시스는 불쾌감은 더욱 깊어졌다.
“미천한 이 몸의 무례한 초대에 응해주셔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고귀하신 황태자 전하.”
“네 가면을 벗고 본 모습대로 응해라. 여긴 너와 나뿐이다. 네게도 더는 물러날 구석도 없으니 불필요한 허례허식은 무의미하지 않은가?”
알렉시스는 차갑고 권위적인 목소리로 상대의 기선을 제압했다.
“허허, 솔직히 이렇게 순순히 응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남자는 아직 완전히 긴장의 끈을 놓치 않은 채 조심스레 상황을 살피며 간을 보았다. 알렉시스 쪽에 어떤 패가 있는지, 혹시 자신이 역으로 함정에 걸린 것은 아닌지를 살펴야 했다. 그는 평소에도 돌다리마저 두들겨보고 건너는 성정이었다.
“제 말도 안 되는 억지를 그대로 따라주시다니. 참으로 무모한 선택이셨습니다, 전하. 승리자이신 당신이 살아남은 생쥐 한 마리를 잡겠다고 어떤 함정이 있을지도 모르는 곳에 무장이나 호위도 없이 맨 몸으로 들어온다는 건 너무도 무책임한 일입니다.”
“주제 넘는군, 내 일은 내가 판단해서 해결한다.”
“아무튼 감사합니다, 시간도 아직 남았는데 할 일 없으시면 제 말벗이라도 되어 주시죠. 마지막 가는 길에 그 정도 자비는 베푸실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알렉시스는 그 말에 조소하듯 피식 웃었다.
“널 아직 살려두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오래 오래 갇혀 살며 심문을 받아야 하니 당장 죽을 것이라고 단정짓지는 말아주었으면 하군.”
“이런, 하지만 과연 당신의 뜻대로 될지? 지나치게 자신감이 넘치시는군요.”
솔직히 알렉시스의 심리는 그리 여유롭진 않았다. 이곳은 상대의 공간이다. 홈그라운드라는 이점에 더해 함정들도 있을 터다. 더욱이 인질의 위치는 아직 확인하지도 못했다. 상대는 상황이 불리해지면 자폭도 불사할 것이다. 어느 모로 봐도 알렉시스와 제국 쪽이 손해를 보기 쉬운 상황이 조성되었다. 하지만 워낙 두 인물 간의 격의 차이가 커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런대로 팽팽한 균형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알렉시스는 무덤덤하게 적을 향해 선언했다.
“두로의 영적 후손들, 에돔의 가짜 유대인들, 그리고 바벨 시티를 수천 년 간 수호해온 너희 어둠의 세력들, 전부 완벽한 패망을 맞이했다. 곧 너희의 영적 시스템의 뿌리도 완벽하게 발본색원될 것이다. 모든 범죄자들이 철저히 책임을 질 것이고 너희의 신과 너희를 연결해주던 통신망은 붕괴한다.”
아울러 키메라의 몸통을 부수고 나면 그 꼬리들이 통제에서 벗어나 폭주하게 되리라. 그때에 사회의 적으로 돌변한 그것들을 숙청하고 나면 사탄이 수천 년에 걸쳐서 구축해놓은 인류 제어용 촉수가 부서지는 셈이다. 그것을 다시 구축하려면 꽤 버거운 수고를 감내해야겠지. 설령 이 자리에서 알렉시스가 사고로 죽는다고 해도 그 정해진 운명의 궤적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네 가찮은 이야기를 좀 듣도록 하지.”
알렉시스는 상대의 장단에 잠깐이나마 어울려주기로 했다. 자신 입장에서도 기회를 엿보며 시간을 끌기도 해야 하니까.
“트라하.”
“알렉시스님.”
위대한 열두 마스터 중의 하나, 이전 세대의 유력한 위인이요 탁월한 능력자, 유럽 대륙의 사실상의 맹주이자 전쟁과 평화의 시대를 아우르며 세계의 재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던 지혜로운 상인, 트라하 폰 바이스하우프트.
그러나 이러한 프로필은 어디까지 표면적으로 드러난 페르소나다. 그는 어둠 속에 감춰진 금단의 지식을 얻은 자, 그리고 금술(禁術)을 통해 획득된 심히 강력한 지성의 힘을 소유한 자였다. 양지에서는 놀라운 위명의 유력한 위인, 음지에서는 음모를 꾸미는 모든 자들을 쥐고 흔드는 큰손. 그는 두 얼굴의 야누스였다.
“내 아버지가 네 동료들을 체포했더니 하나같이 너에 대해서 자백하더군. 의리도 없는 인간들이지. 아니, 네가 그들에게서 덕망을 얻지 못했던 건가?”
“그들을 제 동료라고 부르지 말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같이 얽히기에도 부끄러운 폐기물들이죠.”
“글쎄. 내가 보기에는 너나 그들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데 말이지.”
“어련하시겠습니까, 고귀하신 황태자 전하.”
“그들은 너를 ‘챈슬러(chancellor)’라고 칭하던데, 나름 최고 의장으로 존중받던 위치였다는 뜻이 아닌가? 얼마나 배신을 밥 먹듯 했으면, 같은 배를 탄 동료들마저도 너를 신뢰하지 않았을까. 사실 그게 너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질이란 말이겠지.”
가혹한 질타가 섞인 알렉시스의 날카로운 말들에 트라하는 가까스로 격분을 참으며 평정심을 유지하였다.
“트라하, 항복해라. 그러면 법적인 정의가 선포되기 전까지는 네 목숨을 거두지 않을 것을 약속해주마, 브리튼 제국의 황태자로서 서약한다.”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이미 제 사회적인 생명은 끝난 것이 아닙니까?”
“죽음 앞에서 감히 경솔하게 굴지 마, 트라하. 난 네 생명도 존중한다. 너 역시 주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 중 한 명이지. 이미 양심이 문드러질대로 문드러져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하게 된 너라고 할지라도 말야.”
“또 그놈의 신, 당신들이 섬기는 신이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지 말아라. 네놈들이 모시는 그 벌레만도 못한 악령은 하나님께서 영원한 장작으로 태워 형벌하시기 위해 잠시 보류해둔 미물에 불과하다. 너와 네 어리석은 동료들은 그런 가당찮은 자에게 속아서 인생을 망친 것도 모자라 영혼까지 잃어버린 셈이다.”
“기독교인들의 그 오만과 독선은 여전하군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간이라는 당신도 별반 다르지 않아.”
“난 네게 마지막 기회를 베푸는 거다. 순순히 결박에 응해라. 그리고 너와 네 조상들이 힐렐과 더불어 공유했던 모든 비밀을 남김 없이 실토해라. 네놈들이 숨긴 보물들도 물론 우리 측에서 압수할 것이다.”
“그걸로 무얼 하실 생각이신지? 당신들도 우리처럼 금지된 힘을 취할 작정인가? 역시 위선으로 가득하군요. 결국 당신들도 힘을 탐닉하는 괴물일 뿐이야.”
“천만에. 마귀들과 너희의 연결고리를 분석하여 그 징검다리들을 모두 태워버린 다음 너희가 쓴 ‘불의의 도구’들을 모두 소멸시킬거다. 후세의 그 어떤 세력도 감히 허튼 시도를 하지 못하도록. 두 번 다시 바벨 시티의 유산이 이 지상에 남겨지는 일은 없을 거다.”
“크하하핫! 어리석군! 황태자! 어쩜 그렇게 멍청하리만큼 순진한가!”
알렉시스는 트라하의 경박한 조롱에 눈 하나도 깜짝하지 않았다. 상대의 가면이 벗겨지며 추악한 본 모습이 드러나자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저것이 바로 어머니를 고통에 몰아넣은 흉악한 악마들의 민낯이겠지.
“바빌론의 영은 사라지지 않아.”
“안다. 하지만 그것이 ‘너희의 바빌론’이 멸망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니므롯의 바빌론도 멸망했고, 함무라비와 아모리 족속의 바빌론도 멸망했다. 네부카드네자르의 바빌론도 그러했지. 너희도 그럴 것이다.”
“우리와 우리의 씨앗을 없앤다고 하자. 과연 그렇다고 미래에 또다른 바빌론이 부활하지 못할 것 같은가?”
“그렇게 된다면 그 악(惡)은 내 후손들이 상대해야 할 몫이다. 나는 그저 내게 주어진 시대에 나타난 악을 감당하라는 사명에 최선을 다할 뿐이야.”
한 마디도 굴하지 않는 황태자의 기색에 트라하는 속으로 격한 시기심에 사로잡혔다.
‘혐오스러운 애송이.’
한때는 나름 트라하도 세상을 바꿀 위인에 속한 자였다. 그의 요람인 두로와 에돔의 후손들은 그의 등장을 희망의 징조로 바라보았다. 세계 2차 대전을 통해 지구 질서를 재편하는 데 실패한 뒤 유럽이 브리튼의 속국이 되면서 그림자 세력은 침체기에 빠졌었다. 그런 불리함을 타파하고 반전을 일으켜 줄 것으로 촉망을 받았던 기린아가 바로 트라하 폰 바이스하우프트였다. 돈의 기술, 정치 권력의 기술, 각종 과학 기술력, 심지어 금지된 마법들에 이르기까지 능통함을 보였던 불세출의 천재, 이것이 바로 그의 위엄이었다.
그러나 어찌하여 하늘은 야속하게도 그보다 더한 자를 또 낳았단 말인가. 트라하는 일평생 자신의 영광을 가린 거대한 존재들, 곧 자신보다 앞서 태어나 시대를 뒤바꾼 위인들인 두 쌍둥이 형제의 위엄에 짓눌려야만 했다. 알폰스와 그의 일란성쌍둥이 형제. 두 사람은 트라하의 자존심을 무참히 무너뜨리는 장벽이었다. 외적인 아름다움에서도, 육체적인 강인함에서도, 지혜와 지식에 있어서도, 그 어떠한 재능으로도, 감히 그 벽을 넘지 못했다. 단 한 번도 그를 이기지 못했다.
그로 인해 트라하는 평생 시기심 속에 살아야 했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패배, 국가 대 국가로서의 패배, 그리고 모시는 신의 격차, 도무지 그 열패감을 지울 길이 없었다.
그랬던 알폰스가 그 자신보다 더한 괴물을 낳았다. 트라하와 그의 조상들이 모시던 힐렐은 실상 무능력하며 알폰스의 집안이 모시던 그 신은 모든 약속을 이행할 능력을 지닌 절대자임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이 사실을 무의식 중에 알았기에 트라하는 깊은 증오심과 열패감을 통제할 수 없었다.
‘두고 보자. 네놈이 얼마나 더 잘난 체 할 수 있을지.’
아직 패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브라이틀란트 가문에 고통스러운 상처를 남겨줄 복수가 이미 준비되었다. 마침 가장 위협적이었던 적은 제 발로 함정 속으로 들어왔다. 알렉시스의 품에 다른 카드가 없다는 것만 확인되면 즉시 그 카드를 사용해주리라.
“브리튼의 장래가 장밋빛이리라는 기대는 접어두시죠.”
트라하의 비열하게 뒤틀린 입가에 사악함이 담긴 웃음이 걸렸다.
“과연 당신들의 신이 당신들을 환란에서 구해줄지 구경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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