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169회 [2부] 90화. 뱀의 혀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8.01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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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악한 범죄자로 하여금 가장 김이 빠지게 하는 순간은 무엇일까. 모든 경우에 일반화하기는 어렵겠지만 아마도 희생자가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때가 아닐까 싶다. 보통 흉악범은 자신이 누군가의 목숨 또는 소중한 것을 쥐고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상황을 즐긴다. 그리고 그로 인해 희생자가 벌벌 떨며 자신의 뜻대로 흔들릴 때 기뻐한다. 마치 그 순간만은 신이 된 듯한 스릴을 만끽할 수 있으니까. 헌데 희생자가 목숨을 구걸하지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자신을 무서워하지도 않는다면 그보다 더 자존심이 뭉개지는 일도 없으리라.
트라하가 맞닥트린 상황이 딱 그러했다. 가장 중요한 사냥감인 알렉시스가 자기 발로 직접 덫 안으로 들어왔다. 비무장 상태에서 사방이 자폭 장치로 에워둘러진 진 안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제국을 상대로는 패배했을지라도 적어도 알렉시스라는 한 개인과의 싸움에서는 고지를 점한 셈이다. 이런 상황임에도 알렉시스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벌벌 떨지도, 비굴한 태도를 보이지도 않았고 타협하려는 기색도 없었다. 비무장임에도 되려 눈에 보이지 않는 권위만으로 트라하를 제압하였다. 그 패기에 순간적으로 기가 밀린 트라하는 몹시 굴욕감을 느꼈다.
‘기필코 당신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모습을 보고 싶군.’
이런 뒤틀린 소망을 품은 채 그는 태연스레 대화를 이어갔다.
“두렵지 않으십니까?”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목숨을 잃을 수 있잖습니까. 메시지로 말씀드렸듯 저는 알렉시스님과 함께 이곳에서 물귀신이 되어 묻힐 각오도 되어 있습니다. 자폭할 의지가 있는 적을 상대로는 승리할 수 없는 법이죠.”
“그렇긴 하겠군.”
“다 알고도 당신은 이 개미지옥 안에 발을 들였습니다. 제 요청대로 외부의 지원이나 도움의 가능성도 차단한 채.”
“그분의 생사를 확인해야 했으니까. 희생을 감수할 용기는 내게도 있다.”
“어리석군요. 나와 당신 중 누가 잃을 것이 더 많습니까?”
트라하는 조롱하듯이 상대를 책망했다.
“내가 살든 죽든 어차피 우리 진영의 패배는 바뀌지 않습니다. 반면, 당신의 진영이 당신을 잃는다면 그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손해이죠. 당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어났던 혼란을 생각해보시죠. 동면만으로도 그러했거늘, 제국의 미래인 당신이 후사도 잇지 못한 상태에서 죽는다면? 우리 측에 있어서 그보다 더 큰 복수의 쾌거가 있겠습니까?”
“뭔가 착각하고 있는데 말이지.”
알렉시스는 구구절절 맞게 들리는 트라하의 말을 딱 잘라 반박하였다. 그렇다.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트라하의 논리가 정확하다. 하지만.
“내가 네게 역으로 네 질문을 돌려주지. 지금 이 자리에서 너와 내가 함께 죽는다고 하자. 어느 쪽에게 더 손해인가? 영원이라는 시간의 관점에서 묻는 것이다.”
알렉시스는 냉철하게 몇 년 전의 그 발견을 상기시켰다. 사후 세계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증명한 장본인이 바로 이 자리에 있었다. 악인의 사후에는 영원무궁한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 이제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이 명제에 반박하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힐렐을 신으로 숭배하는 자라고 해서 이 법칙에서 자유로울까?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아. 그분이 내 영혼을 사망의 골짜기에서도 지키실 것이다. 이번에 꿈을 꾸면서 난 그분의 손길을 더욱 확실히 체험했다. 더는 땅의 생명에 일희일비하며 휘둘리지 않아. 하지만 넌 어떻지? 넌 네가 죽은 뒤 네 악행에 대해 보응받을 순간에 대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나?”
그 지적에 아주 잠시 트라하는 작게 전율하였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듯한 본능적 공포가 그의 척추 신경 전체를 전기 충격을 주듯 강타하였다. 알렉시스의 눈은 사자와 같은 결연한 용맹으로 붙들린 채 여전히 견고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궤변이군요. 그렇다 한들 당신의 죽음이 브리튼 제국 측에 막대한 굴욕임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그 부분에 대한 착각도 바로잡아 주지.”
알렉시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투로 한숨을 쉬었다. 한심스러운 존재를 마주하는 듯한 지루한 태도였다. 알렉시스가 없으면 브리튼의 미래는 끝난다. 그런 식의 과도한 기대의 말들은 어릴 적부터 지겹도록 들어왔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사람들의 얕고 경박한 사고방식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브라이틀란트 가문의 언약은 차기 가주가 불의의 사고로 죽는다고 해서 취소되지 않는다. 내가 비록 자녀가 없이 죽는다고 해도 달라지지는 않아. 잊은 건 아니겠지? 황제 폐하께는 직계 혈통의 자녀가 일곱이나 된다.”
비록 역사 속에서 가주가 승계식을 하기도 전에 끊어진 사례가 없어서 실례를 들긴 어렵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그렇게 허술하지 않다. 역대 가주들은 이 사실을 믿어왔기에 불안감에 시달리지 않았다.
만일 알렉시스가 죽는다면 언약의 법률 상 황제와 황후가 직접 낳은 혈통인 일곱 자녀 중 하나가 다음 후계자로 인정된다. 그중 누가 선택될지의 여부는 개개인의 성품, 행적, 특성, 자격, 영성 등의 변수들이 복잡하게 작용할 것이다. 하지만 어쨌건 그들도 정식 후계자로서 언약을 이어 받긴 할 것이다.
물론 그렇게 대리자로서 언약을 계승할 형제가 알렉시스만큼의 재능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태어날 때 얻은 재능과 현재의 역량은 그대로 유지되겠지. 이러한 점은 확실히 브리튼 입장에서는 부담의 요소가 된다. 일곱 형제가 뛰어나다고는 해도 알렉시스 같은 세계 전체를 이끌 그릇에는 턱없이 못 미친다.
하지만 언약의 내용이 유지된다는 가정 하에서는 시간만 벌면 그만이다. 그 다음 대와 그 다다음대에 이르기만 하면 충분하다. 알렉시스의 형제 중 하나가 황태자 대리가 되어 자녀를 낳으면 그 자녀는 부모의 두 배의 역량을 갖는다. 그리고 그 자녀가 다시 장성하여 자손을 낳으면 다시 두 배의 뛰어남이 곱해진다. 그러므로 대략 40년에서 60년 정도의 시간만 버티면 브리튼은 다시 알렉시스에 얼추 버금가는 군주를 얻게 되는 셈이다.
개인적으로 알렉시스가 이런 가정법 안에서 눈여겨 본 후보는 동생들 중 테서렉틴이었다. 테디가 만일 훌륭한 아내를 얻어 좋은 아이를 낳고 잘 양육한다면, 그리고 그 아이가 더 훌륭한 아이를 낳는다면, 그 조카 손주는 자신을 대신하기에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요점은, 트라하의 비열한 혀에서 나온 협박과 불안감 조성이 알렉시스에게는 별 타격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과연 동생들에 대한 확신과 신뢰가 상당하군요.”
트라하가 다시금 비열하게 비아냥거렸다. 그 불쾌감에 알렉시스의 미간에 주름의 일그러짐이 일었다. 자신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저 배반자의 역겨운 입술에 담기는 상황이 유쾌치 않았다.
“하지만 이건 어떨까요?”
뱀의 혓바닥이 춤추듯, 간악한 자의 입술은 독이 담긴 말들을 흘려 보냈다. 불안감으로 상대를 흔들 수 없다면 의심은 어떨까?
“알렉시스님, 과연 고귀한 황실이 예전의 고결함을 더럽히지 않은 채 잘 유지하고 있을지요? 이 몸은 몹시 걱정이 듭니다만?”
“무슨 말을 하고 싶지?”
“우리가 이미 오랜 세월 당신들의 혈통과 정신을 내면에서부터 더럽혀왔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당신들의 자긍심인 그 내적인 순수성, 이미 그 투명한 물이 우리의 영향력과 섞여 혼합물이 되었다는 사실을요.”
여러 가지가 함의된 말이었다. 어느 부분까지 섞였다는 것일까? 이 이야기는 사실 알렉시스도 이미 어느 정도는 알던 바였다. 하지만 이번만은 잠자코 저들의 입으로 자백을 받길 원했다. 트라하가 어떤 말을 떠드는 지 차분히 듣고 냉정하게 분석해보기로 했다.
“누가 누구인지 말씀드릴 생각은 없지만, 황실 방계 후손들 가운데 적잖은 수는 우리와 더불어 ‘섞인 자’들입니다. 당신의 사촌 형제들, 육촌과 팔촌 형제들 가운데도 그런 이들이 상당히 있습니다. 혈통에서의 오염, 사상과 가치관의 오염, 그리고 영적인 오염에 이르기까지. 이미 우리의 영은 당신들 안에 깊숙이 침투하여 기생하는 중입니다.”
“그래서? 할 말은 다했는가?”
“두렵지 않습니까? 설령 지금 우릴 없앤다 해도 당신들은 내부에서부터 무너질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들을 숙주로 삼아 다시 한 번 부활하게 되겠죠.”
“그럴 가능성이 없진 않겠군. 헌데 트라하, 내가 오늘 널 찾아와 승부를 보려는 것이 바로 그 가능성을 없애기 위함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나?”
알렉시스의 경고성 어조에 트라하는 사납게 비웃으며 되받아쳤다.
“크큭, 이 몸을 잡아 심문한 뒤 가문 속에 스며든 ‘섞인 자’들을 잡아내기라도 하실 생각이신지요? 역시 철혈군주답습니다. 확실한 승리를 위해서라면 친지마저도 끊어내시겠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위선적인 가면보다는 그나마 낫군요.”
“이젠 일일이 바로잡아주기도 수고롭군.”
알렉시스라고 가족들과 친척들 사이에 저들의 영향력이 스며들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당장 그가 사랑하는 아우인 에쉬튼만 해도 그런 사례였다. 하지만 누군가를 숙청하거나 끊어냄으로써 위험을 예방하는 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이슬람 제국을 상대할 때도 그는 쉽게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 어려운 길을 선택했다. 가능한 희생을 최소화하고 사람들을 올무에서 구해내는 방식을 취했다.
“단순히 너희에 속한 ‘인간들’을 심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아. 너희의 ‘영(靈)’을 잘라낼 생각이다. 그렇게 한다면 너희 자신을 포함하여 너희가 섬기던 그 폭군 악령의 지배 아래서 허덕이던 이들도 자유를 얻겠지. 내 친척들 가운데 너희의 노예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 역시 새 삶과 새 기회와 용서를 얻게 될 것이다.”
“크하핫, 이상주의자의 허황된 꿈입니다!”
트라하의 표정은 본격적으로 악의에 충만해졌다. 현명한 위인의 가면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이제 사악한 광기, 곧 그의 본색이 온전하게 수면 위로 드러났다.
“당신들은 용서와 자비의 신을 믿는다고 하죠? 헌데 그 신이 과연 음행과 간음의 산물에 대해서는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합니다. 부정한 가운데 태어난 자를 언약의 울타리 안에 남도록 용서해주시겠습니까? 가나안의 갓난아기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도록 명령하였던 그 신께서?”
“뭐?”
침착하던 알렉시스의 얼굴이 차갑게 얼어붙은 분노로 딱딱해졌다. 신성모독에 대한 격분 때문만은 아니었다. 트라하의 입에서 나온 ‘간음’이라는 단어가 그의 역린을 찔렀다.
“히브리인들의 신은 초자연적 존재들과 인간들 사이에 피가 섞이는 것을 혐오하였죠. 그래서 그는 홍수를 일으켜 한 종족을 멸하였습니다. 단지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혼혈 종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재 자체를 용서받을 수 없다는 이유로 혼종은 물론 인간까지도 몰살한 것입니다.
아아, 그런 그가 그토록 아끼고 싸매는 당신의 가문에도 동일하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기를! 그러나 만일 그가 당신의 그 안일한 태도처럼 용서를 베푼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더욱 재미있는 일이 되겠군요. 나는 진심으로 궁금합니다. 당신의 망할 아버지인 알폰스 황제와 당신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그 장면이 말입니다.”
알렉시스의 격분은 냉정한 이성 가운데서 절제되고 정제되었다. 그는 매서운 눈으로 트라하를 노려보며 침묵을 유지하였다.
“알렉시스님, 당신이 아끼는 형제 가운데 부정한 가운데 태어난 자, 곧 내가 남긴 씨앗이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에쉬튼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부정함’이라 단어에는 입양아가 아닌 사생아에 대한 암시가 함의되어 있다. 즉 황제 혹은 황후에게 간통의 산물인 아이가 있노라고 정죄하는 말인데, 트라하 스스로 ‘본인의 씨’라고 말하였으니 결론적으로 황후가 자신과 더불어 간음하여 사생아를 낳았다고 주장하는 격이 된다.
이 말이 거짓이라고 할진대 인륜의 선을 넘는 언어적 모독이 되는 것이며 만일 사실이라면 더더욱 극심한 모독감을 주는 격이다. 알렉시스가 평생 아끼던 동생들 중 하나가 사실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것으로도 모자라 두로와 에돔의 사악한 저주를 이은 더럽혀진 가짜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트라하, 네 입술이 내뱉은 말이 너를 정죄할 것을 기억해라. 너는 영원한 저주를 받기에 합당한 자로 너 스스로를 증명하고 있다.”
분노하는 가운데서도 알렉시스는 진노에 먹히지 않고 바른 정신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미 잃을 것이 없는 악인은 이 상황이 즐거운지 개의치 않고 자신의 흉측한 진실을 뽐내었다.
“알렉시스님, 그 아이 말입니다, 너무도 특이한 재능을 지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번에도 알렉시스는 트라하가 가리킨 대상을 곧바로 이해하였다. 그가 곧장 대답하지 못한 이유는 머릿속에서 맴돈 어떤 의문 때문이었다.
“마치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는 듯한 능력, 알렉시스님도 그런 종류의 재능은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이안. 그 아이는 특이하다. 다른 동생들은 알렉시스의 부분적인 하위 호환에 가까운 재능만을 소유했다면 이안은 매우 이질적인 능력을 지녔다. 마치 영(靈)이 깃들린 것처럼 완전히 다른 인격체가 될 수 있는 능력. 그것을 과연 ‘연기의 재능’이라는 범주로 설명할 수 있기나 한걸까? 혹 완전히 궤가 다른 어떤 괴이의 권능은 아닐까?
공교롭게도 이안은 황제의 피를 직접 이은 아이들 중 유일하게 자색 눈을 타고 나지 않은 아들이었다. 황가의 상징이자 언약의 흔적이 유전자 속에 새겨진 간접적 증거라고 할 수 있는 그 특질을 말이다.
“계몽자가 나타났을 때, 저는 많은 가능성들을 고려했습니다.”
트라하는 여유로이 상황을 즐기며 말을 이었다.
“누가 힐렐, 혹은 수수께끼의 그 신을 이승에 불러들였는가? 많은 후보들이 떠올랐습니다.”
당시 트라하는 자신과 자신의 후손만이 힐렐의 그릇으로서 후보가 될 수 있음을 확신했다. 이것은 근거가 없는 자신만의 주장이 아니었다. 그는 실제로 여러 주술 의식과 마법을 통해 지옥과 더불어 다중의 계약을 체결하였다. 이 과정에서 인신 제사도 드렸으며 전쟁과 전염병을 통해 숱한 영혼들을 희생시키기도 했다. 금지된 흑마법을 통해 자신의 생명, 피, 심지어는 혼의 일부까지 바쳤다.
아울러 그는 두로와 에돔의 후손들은 물론 카발라 종교 집단 및 각종 사탄숭배자들과 연맹하여 그들의 모든 기술을 자신의 것을 취하였다. 심지어 그들이 조상들에게서 물려 받은 ‘숨겨진 보물’들의 제어권도 기어코 자신의 것으로 독점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초자연계와 인계 사이의 연결점의 대다수를 트라하가 집착적으로 집어삼킨 이 상황에서 힐렐이 다른 경로를 통해 악령계의 권세를 강림시키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트라하의 피와 유전자는 실상 현재 마계에서 인간계로 어떤 존재가 건너오기 위한 필수 패스워드와도 같았다.
그리고 트라하에게는 스페어 카드로 쓸 여러 씨앗이 있었다. 여러 차례의 이혼 경력도 있었고 전처들에게서 얻은 자녀들도 다수 존재한다. 정부 역시 수없이 두었고 그들에게 남긴 씨앗도 상당했다. 사생아와 정자 기증을 통해 만든 아이들의 숫자까지 고려하면 그 수를 일일이 헤아리기도 어려웠다.
“나는 내 씨앗 중 하나가 왕의 그릇으로 각성한 것이라고 의심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가장 의심했던 대상은 바로 황실에 심어둔 사생아였습니다.”
실제로 그의 의심은 반 정도는 정확했다. 계몽자의 이름을 자처하던 존재, 그의 정체는 이안이 맞았다. 다만, 그는 어둠의 조직들이 바라는 방식대로 움직여주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무슨 의도로 움직이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나중에서야 그가 중앙정보국장 및 펠렌드로크 그 애송이와 연맹하여 멍청이들을 함정에 빠트린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만.”
그때 알렉시스는 의아해하며 잠시 멈춰 생각했다.
‘그렇군. 트라하는 아직 이안이 누구의 도움을 받았는지를 정확히 모르는건가?’
말하는 문맥을 짚어보니 아무래도 그 계획의 주동자가 제로스임에는 도달하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일단 익명 작가이다보니 제로스가 독특한 방면에 능통하다는 사실까지는 다 알지 못한 모양이다. 아마 트라하는 이안을 부추겨 함정을 판 주체가 에쉬튼과 펠렌드로크라고 추측하는 듯했다. 첩보와 책략에 가장 능통한 둘이니 그런 추리는 합리적이다. 실제로 둘도 이번 진압에 관여했으니 아주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 핵심을 맞출 듯 말 듯 절묘하게 빗나간 추측이다.
‘들키지 않는 편이 좋겠군.’
알렉시스는 치열한 심리전 가운데 조금이라도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철저히 냉정을 유지하며 입술을 단속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라하는 적그리스도 역할을 맡은 배우가 이안이라는 사실에는 중간 단계 정보 없이 곧바로 도달했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곧장 정답지에 도달할 수 있었단 말인가? 이안은 세간에 황자로서의 신분이 드러나지도 않은 사람 아닌가? 그렇다면 이안과 트라하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모종의 연관성이 존재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알렉시스의 생각은 아주 잠시 복잡한 의문으로 흔들렸다.
“나는 그가 우리를 멸망시킬 의도가 있었음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상했단 말이죠. 그때 제가 몰래 감찰했지만, 그가 우리에게 드러낸 그 임재는 분명 이계의 것이 맞았습니다. 단순히 겉모양 흉내만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단 말이죠. 저는 그 부분에서 의문을 느꼈습니다.”
알렉시스는 이렇게 말하는 트라하의 표정을 면밀히 주시했다. 거짓으로 무언가를 꾸며낼 때의 표정 변화가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알렉시스는 설령 가장 뛰어난 거짓말쟁이라 할지라도 그의 본색이 무엇인지 바르게 탐지해내는 매우 비상한 재능을 지녔다. 트라하는 지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모든 마법에 통달한 저이기에 알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장로들은 속을 수 있을지라도 제 통찰력은 속일 수 없었죠. 그때 그 순간에는 정말로 그 아이의 안에 어떤 권능이 임했습니다.”
알렉시스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그러니 네 말을 요약하자면.”
상대의 말장난에 응해줄 생각은 없었다. 다만, 저자가 왜 저런 발언으로 자신을 혼란스럽게 하는지, 그 진의를 파악할 필요는 있었다. 트라하는 무슨 목적으로 왕의 분노를 감당하면서까지 모독적인 발언을 쏟아내는 것인가?
“이안 블레이크, 아니 내 동생 이안 이즈카르 브라이틀란트, 그는 영계의 존재들을 자신 안에 받아들일 수 있는 초자연적 재능을 지녔다. 그는 최근에 힐렐로부터 어떤 영적 힘을, 어쩌면 힐렐 자신의 임재를 일부 받았다. 그리고 그는 처음부터 알폰스 황제 폐하의 아들이 아닌, 너와 황후 전하 사이에서 생긴 아이다. 이 말을 하려는 것인가?”
“대단히 침착하시군요. 그걸 자신의 입으로 다시 정리하실 줄이야.”
“그야 물론 네 말을 믿어줄 생각이 없으니까.”
흔들림과 의혹이 순간적으로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알렉시스는 극한의 위기 가운데서도 마음을 잃지 않은 강인한 청년이었다. 목숨의 위협을 느끼면서 잔인하게 거세를 당하는 도중에도 심지가 꺾이지 않았던 그였다.
“그게 네가 나를 흔들 수 있는 최선의 공격이라면, 실망이군. 네가 던질 수 있는 무기가 그것뿐인가?”
“두렵지 않습니까?”
“뭐가 말이지?”
“당신들의 가문 가운데 광명의 신의 영, 곧 당신들이 멸칭으로 말하는 ‘적그리스도’의 영이 암약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사실 말입니다.”
이에 다시금 알렉시스는 대꾸하지 않고 침묵으로 응수하였다.
“제 진단입니다만, 어쩌면 아직 그 영은 아이의 몸을 완전히 차지하지는 못한 것일지도요. 이건 영계와 인간계가 접속될 때 으레 일어날 수 있는 현상입니다. 간혹 숙주가 자신 위에 임한 신내림에 저항하는 경우가 있죠. 어쩌면 그런 이유로 인해 행동의 방황이 빚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진실일까? 이안이 정말로 단순하게 연기력만으로 그런 존재를 그려냈을까? 차분히 생각해보면 의아함이 들기도 했다. 일개 인간이 어떻게 영계의 존재를 완벽하게 묘사한단 말인가. 게다가 한두 명도 아닌 노련한 주술사 수천 명을 동시에 속였다. 심지어는 저 간교한 챈슬러, 트라하 폰 바이스하우프트까지도 일시적으로나마 현혹되었다. 어쩌면 부분적으로나마 이안 위에 어떤 실제 영적 존재가 내려앉았다는 가설이 더 설득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다 한들 이안이 내 아우가 아닌 건 아니야.’
하지만 마음속으로 그렇게 안위해보아도 찝찝한 두려움은 완전히 씻기지 못했다. 만일 저자의 말이 일부나마 맞다면, 나머지 말들도 모두 거짓부렁이라는 보장이 있는가? 혹 이안의 원 재능 자체도 단순한 연기력이 아닌 더 깊은 기원에서 기인한 능력이라면? 더 나아가 그의 출생이 정말로 그런 불결한 부정직함과 연루된 것이라면? 사실일 가능성을 단 1%만큼이라도 고려하고 싶지 않았다.
‘흔들려서는 안 돼.’
저 뱀처럼 간악한 자의 혀놀림에 더는 놀아날 수는 없다.
“알렉시스님, 제 말이 믿기지 않는군요?”
트라하는 알렉시스의 얼굴 위에 스쳐간 미약한 흔들림을 발견했는지 마침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승리에 대한 희미한 소망이 생겼다. 그는 심리전의 방향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쐐기 박기 위해 준비된 카드를 꺼내 보이기로 작정했다.
“어쩔 수 없군요. 증명해주는 수밖에.”
뚜벅, 뚜벅.
바로 그때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 공간 안에 머물던 또다른 한 사람이 마침내 대화에 개입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발소리와 함께 고풍스러운 인상의 한 고귀한 인물이 강당으로 들어왔다. 알렉시스와 트라하 모두 그 방향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그녀가 누구인지는 알렉시스도 당연히 잘 알고 있었다. 애당초 바로 저 인물의 중요성 때문에 함정임을 알고도 여기 일부러 걸려준 것이니까.
“어서 오시지요.”
악인은 가증스럽게도 공손히 귀족의 예를 다해 몸을 숙여 그 상대를 향해 경의를 표했다. 반대로 알렉시스의 얼굴은 긴장으로 굳었다. 그녀의 정체에 놀라서가 아니었다. 그녀가 결박된 인질이 아닌 자유로운 몸으로써 트라하 곁으로, 그것도 동료로서의 태도로 다가간 탓이었다.
“이렇게 셋이 함께 마주하는 건 또 처음이군요.”
트라하는 입가에 올라오는 조롱의 웃음을 겨우 절제하는 중이었다.
“황후 전하, 그리고 황태자 전하.”
육십대 중후반임에도 불구하고 주름조차 거의 없는 매우 아름다운 얼굴. 큰 키와 고운 풍모, 귀족스러운 품위의 자세. 검소한 예복을 입고 있음에도 감춰지지 않는 강렬한 아우라와 드높은 격. 방 안에 입장한 사람은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칭송과 영예를 누리는 최고의 귀부인이었다. 세일린 황후.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트라하와 흘깃 눈을 마주쳤다. 이어서 그는 눈을 돌려 알렉시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어 보였다. 마치 심연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두려움이었다.
“자, 황후 전하. 나의 오랜 친우여. 이곳에 행차하신 우리 황태자께 모든 진실을 가르쳐주시길.”
트라하는 이죽거리며 황후를 부추겼다. 황후는 표정 하나 변화 없이 냉정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응시하였다. 알렉시스는 마치 생각이 멈춘 사람처럼 그대로 정지하여 한참을 입을 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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