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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170회 [2부] 91화. 두 여인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08.04 | 회차평점 0 0

 

 

 

그녀가 그 사내들을 처음 만난 건 열일곱 살 무렵, 공식적인 국가 행사로서 베풀어진 피로연에서였다. 정재계 유력 인사들부터 각 분야의 석학들, 전문가들, 대표들에 이르기까지, 지구의 절반을 선도하는 모든 최상위층이 모인 자리. 그곳에서도 단연 빛나던 이는 둘이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청년들로 알려진 두 쌍둥이. 외모부터 성정까지 복제품마냥 똑같은, 그러나 동일하게 최상품으로서 흠 잡을 데 없는 두 찬란한 보석. 모든 이가 약속이라도 한 듯 두 사람에게 접근하여 칭송과 예우와 아양을 아끼지 않았다.

 

 

근현대 이후로 브리튼에는 귀족제가 사라졌다. 언약을 관리하는 황실의 주인들 외에는 공식적으로 신분이 평등하다. 황제와 그 후계자의 특별성 또한 인간 존엄성에서의 우월이 아닌, 특수한 책임에서 기인할 뿐이다.

 

 

그럼에도 현실적으로는 비공식적으로 계층이 나뉘는 현상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 인간이 사는 세상이라면 어디나 같겠지만 사람마다 가진 것이 다르다. 그 차이가 선천성에서 기인했건, 계승에서 기인했건, 혹은 노력에서 기인했건, 분명히 소유와 능력과 지위의 차이가 실존함은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 자리는 사실상의 ‘귀족들’에게 허락된 특혜였으며 그녀도 그런 은택을 입음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녀는 확실히 모든 젊은 여인들 가운데 금성과 같이 찬란한 광도를 자랑하는 별이었다. 아직 성년에 이르지 않았음에도 그러했다. 지혜와 영민함, 가문의 후광, 각종 재능과 박식한 식견, 교양과 범절, 언행과 태도의 고풍스러움과 세련됨, 타인을 끌어당기는 매력에 이르기까지.

 

 

그런 그녀였기에 은연 중에 자만심을 품었는지도 모른다. 저 찬란한 두 작은 태양들도 자신에게 시선을 베풀리라는 교만함. 하지만 실제로 두 잘생긴 청년들을 직면하여 직접 마주보며 대화를 섞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존재감이 위축됨을 느꼈고 뽐내던 마음 속 생각을 민망하게 여겼다.

 

 

누구에게도 연모를 내주지 않던 고고한 그녀였다. 그랬었건만, 처음으로 첫 눈에 반하는 경험을 불가항력적으로 겪으면서 프라이드가 허물어졌다. 상대는 이미 서른이 넘은 어른들이었고 자신은 아직 미성년자이기에 그 마음을 당장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차분히 기다리며 좋은 기회를 궁리하였다. 그녀의 가문, 그리고 그들과 친분을 두고 교류하던 가문들도 어느 정도는 그녀와 이해타산이 일치되는 생각을 품었던 모양이다.

 

 

어른들은 그녀의 짝으로서 쌍둥이 형제 중 동생 쪽을 선호하였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쪽이 그들 입장에서는 정략적 이용 가치가 높다고 보았으리라. 그녀는 어른들의 그런 복잡한 사정들까지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만남과 교류가 쌓일수록 동생 쪽보다는 형 쪽에 마음에 끌렸다. 동일한 성품에 동일한 재능, 외모와 체형까지도 동일함에도 설명되지 않는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외적인 요소들을 초월하는 어떤 깊은 차원의 매력이랄까. 그녀는 그 매력에 점점 깊이 빠져들었다.

 

 

두 형제 중 누가 ‘유일무이한 황태자’로 확정될지는 사실 미지수였다. 맏이의 법칙에는 둘 모두 해당사항과 자격이 있었다. 심지어 둘 모두에게 권리가 허락되어 제국 영토 또는 제국 통치권을 공정하게 양분하는 경우의 수도 가능성이 존재했다. 만일 한 쪽에게 모든 권한을 몰아주었을 때 다른 하나가 과거 조상들이 맺은 신적 언약의 조약을 내세워 항소한다면 인간 왕에게는 합당한 반론의 권리가 없다.

 

 

하나님께 신실한 사람들은 쌍둥이 중 형이 왕이 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모든 조건 면에서 같았던 두 사람의 결정적 차이가 바로 신앙에 있었다. 동생은 명목 상으로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고백했으나 다시 태어남의 증거가 분명치 않았고 구원에 대한 확신도, 성경적 세계관 역시 두루뭉술했다. 반면에 형은 확고하게 주님을 경외하며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반대로 이 이유로 인해 음흉한 속셈을 품은 귀족들은 동생 쪽을 은근 지지했다. 설령 그가 유일한 왕이 되지 못한다고 해도 그를 내세워 제국을 반으로 나누는 일도 충분히 유익한 가치가 있는 접근법이었다.

 

 

세일린의 친족들과 부모님이 그녀를 두 번째 황자에게 이어주려 했던 것도 그런 이유와 연관이 깊었다. 그들은 최선의 경우에는 브리튼 제국과 외척을 맺으려 했고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해도 반쪽이나마 취하여 자신들이 터를 잡을 숙주로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 기대와 다르게 흘러갔다. 둘째 황자는 첫째 황자만큼 신앙심이 좋지도, 하나님을 올바르게 경외하지도 못했지만, 대신 형에 대한 애정과 신뢰는 확실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그림자로서의 자질을 타고난 자였다. 그는 일부러 둘로 나뉜 언약계승권 중 자신이 소유한 절반을 형에게 양도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알폰스가 유일한 황태자로 확정되었다. 이것은 세일린에게 있어서는 되려 불리한 흐름이었는데 그녀가 연모하던 알폰스와의 관계 진전이 불투명하게 된 것이다.

 

 

귀족들은 접근법을 바꾸었다. 알폰스는 그들이 조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도 없는 인간이다. 그는 신에게만 절대적 충성을 바칠 종이다. 자신 속에 세상과의 타협할 요소를 조금도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그의 정치적 노선도 그런 방향성을 철저히 유지하리라. 그 길을 왜곡할 유혹의 수단이 거의 없었다. 동생 쪽이라면 공략해볼 가능성이 있었건만, 문제는 그 동생이 형의 말에는 신실하게 복종하니 형이 황태자가 된 지금은 그마저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귀족들은 발상을 바꾸어 황태자와 그가 이끌 세계를 몰락시키는 방향을 획책했다. 세일린의 친족들과 그 동료 가문들은 그녀를 황태자와 이어지지 못하도록 차단했고 그 대신에 다른 트로이 목마를 내보내는 데 찬동했다. 아무래도 이런 떳떳치 못한 일에는 가문의 귀중한 구성원을 장기말로 소모하기보다는 준비된 용병을 쓰는 편이 나았다.

 

 

이런 복잡한 뒷사정이 배후에 작동하기는 했으나 어쨌건 표면 상에서는 세일린과 다른 한 여인의 정정당당한 실력 경쟁이 있었다. 귀족들의 꿍꿍이가 어떠했건 결국은 알폰스가 자유의지에 의거해 결정한 상대가 그의 반려가 되었을 것이다. 알폰스는 순수한 사랑에 이끌려 세일린이 아닌 다른 여인을 택했다.

 

 

세일린은 가문들의 배후에서 작동하던 어두운 속셈에 대해서는 몰랐다. 그녀는 경쟁에 대해 승복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인생 최초의 좌절이자 씁쓸함이었다. 해결하지 않고 속에 담아둔다면 필시 쓴 뿌리가 되어 자라나 삶 전체를 괴롭게 했을 수도 있었다. 그녀는 고귀한 사람답게 그 아픔을 담아두되 절제하였고 자신을 훈련시키는 채찍으로 삼았다.

 

 

친족들은 황태자가 반려를 얻은 뒤로도 세일린을 둘째 황자에게 연결해주려 노력했으나 알폰스를 짝사랑했던 세일린은 이를 거절했다.

 

 

 

 

 

 

 

 

 

 

 

*

 

 

 

 

 

알렉시스는 소년 적부터 그릇 면에서 남들과 달랐다. 단순히 재능의 양과 질이 풍부하다는 것, 그 이상이었다. 너무 일찍 철든 아이, 정신 연령 면에서 그는 지나치게 이른 나이에 어른이 되었다. 다른 아이들이 아무런 걱정 없이 뛰놀던 시절에 그는 나라의 내일을, 가문의 앞날을, 그리고 인류의 운명을 고민하며 스스로를 검증하고 시험해야 했다. 주변에서 누가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그렇게 해야 함을 깨닫고 그 고초의 길을 수용하였다.

 

 

그랬던 아이였기에 그는 어머니의 이른 죽음과 곧바로 이어진 아버지의 재혼이라는 혼란스러운 가정사적 격변 속에서도 의연함을 유지했다. 그는 어머니의 비극을 현실로서 인정했다. 괴로움과 쓴 뿌리를 가슴 깊은 심연 속에 묻어두고 내일을 향해 나아갔다. 또한 아버지의 냉정해보이던 선택을 존중했다.

 

 

하지만 정말로 아무렇지 않았을까? 그는 여덟 살이 되기 직전에 어머니를 눈 앞에서 떠나보냈다. 아버지는 형식적인 애도의 기간조차 갖지 않고 이상하리만큼 빨리 새어머니를 맞이하였다. 첫 동생인 세르빈이 태어난 건 심지어 그 해의 겨울철이었다. 어린 소년의 가슴 속에 서운함이라는 감정이 침전되지 않았을까?

 

 

그래도 그는 첫 동생을 상대로 자신이 마땅히 대해야 할 의무를 외면치 않았다.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답게 가족들을 신실히 보살피며 돌보아야 한다. 그런 의무감이 아이의 마음 속에 기계적으로나마 장착되어기에 그는 황실의 후계자답게 아이를 사랑으로 품었다. 적어도 그렇게 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이듬해에 두 쌍둥이가 태어났을 때 유독 그들에게 다가가기가 심적으로 버거웠던 것은 왜였을까? 어쩌면 감정적으로 선한 의무를 다하려고 무리해서 노력한 탓에 지쳐 내려앉은 탓인지도 모른다. 처음 받은 충격은 의젓하게 수용하고 용서하려 애썼다. 그러나 새어머니의 두 번째 출산은 아버지가 정말로 어머니를 잊었음을 확증하는 증거처럼 보여 마음이 무거웠다.

 

 

쌍둥이 중 자신의 영악한 측면을 닮은 아이는 차라리 대하기가 편했다. 왕과 신하로서의 관계만 신실하게 이어나가면 되니까. 그러나 다른 한 쪽 아이는 너무 맑고 순수했으며 자신이 갖지 못한 영혼의 깊은 자유로움을 지녔다. 되려 그 점이 더 거리감을 들게 했다. 아이는 언제나 강아지처럼 자신을 따라다니며 형의 애정을 구했으나 형으로서의 최소한의 책임 외에는 일부러 벽을 유지했다.

 

 

그랬던 알렉시스가 체념하듯이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이 주신 환경을 인정했던 것은 넷째가 태어난 뒤였다. 그것이 정말 기독교적인 자기 부인이었을까, 아니면 반강제적인 포기였을까. 지금도 알 수는 없다만, 확실한 건 그때의 알렉시스는 마음의 부담을 상당 부분 내려놓았다. 더는 큰 부담감 없이, 순수하게 넷째 동생을 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새어머니에 대한 마음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어렵고 복잡했다. 그분과 온전히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앎을 공유하지 못했다. 알렉시스도 그녀를 어려워했으나 그녀 또한 그러했다. 그녀의 얼굴을 보면 무언가 말하지 못할 비밀을 가슴 속에 숨긴 채 베일로 표정을 덮는 듯한 기색이었다. 알렉시스는 굳이 그것을 파헤치려 하지는 않았다. 세상 모든 거짓말쟁이들의 폐부를 꿰뚫는 재능을 지녔지만 새어머니를 향해서는 그렇게 하고픈 마음 자체가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새어머니의 정체성 자체를 의심했던 것은 아니었다.

 

 

 

 

 

“세일린 로제타 브라이틀란트 황후, 이분의 결혼 이전 가문인 라크펠러 가(家)는 우리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일원은 아니지만, 구성원의 상당수가 우리와 연맹을 맺은 가문이지.”

 

 

현 시점에는 가문의 대가 끊어진 탓에 여러 개의 부속 가문으로 나뉘어져 성 자체를 각기 다르게 갖긴 했으나, 몇십 년 전만 해도 라크펠러 가는 유럽과 북부 신대륙의 정재계를 아우르는 강력한 집안이었다. 그들 전부가 ‘어둠의 무리’에 속했던 것은 아닌 듯하나 최소 50% 이상은 그들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당장 이번에 체포된 내란 가담자 가운데도 한때 라크펠러 가의 방계에 속했거나 그 구성원의 후손인 경우가 적지 않았다.

 

 

사실 과거 유력했던 가문의 대부분이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그들’의 무리와 연결되어 있었기에 특정 한 가문을 낙인찍어 위험한 무리로 간주하기는 불가능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너무 안일했다. 트라하의 블러핑이 마냥 허언은 아니었다. 이미 황가에까지도 그들의 영향력이 침투했다는 말이 정말이었다. 황후조차도 그들과 연결되어 있었을 줄이야.

 

 

하지만 세일린 황후의 출신의 문제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는 그녀 본인이 실제로 트라하와의 연결점을 지녔다는 부분이었다. 이 부분만은 알렉시스에게도 예상치 못한 충격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의심의 생각이 전혀 스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만, 이렇게 눈으로 확인받는 것은 충격의 깊이가 달랐다.

 

 

“어째서입니까?”

 

 

한참을 침묵하던 알렉시스가 떨리는 입술로 물었다. 동요하는 기색을 절제로 억눌러보았으나 완벽하게 침착함을 유지하긴 어려웠다. 알렉시스는 생각했다. 자신은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진실의 범위가 어디까지 뻗을지 무서운가? 판도라의 상자 속 진실이 자신의 역린을 어느 부분까지 찌를지 불안감이 드는가?

 

 

‘나는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던가?’

 

 

지금 와서 보니 그렇지 못했음을 시인해야만 했다. 트라하는 만만한 적수가 아니었다.

 

 

“언제부터였습니까?”

 

 

이에 트라하가 먼저 말을 가로챘다.

 

 

“당신의 어머니가 죽기 몇 년 전부터. 세일린님은 이미 우리의 다음 도구로 준비되고 있었죠. 당신들의 신의도 배신하고 우리의 신의도 배신하여 어디에도 쓰지 못할 박쥐가 되어버린 당신 어미를 대신하여, 우리도 나름 앞날을 준비했어야 했으니까요.”

 

 

무언가 엄청나게 두려운 진실의 파편이 새어나오는 데도 알렉시스는 한참 침묵으로 멈췄다. 머리가 터질 듯이 지끈거렸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가늠하기에도 벅찼다. 심리적으로 동요하는 바람에 트라하의 표정에서 거짓말을 읽는 작업을 놓치고 말았다.

 

 

“내 가문은 그녀의 가문과 오랜 친분으로 연결된 사이였죠.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가까웠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여러 조언을 주었었고 그녀는 몰래 나를 동역자로 삼아 협력했었죠. 그 밀월 관계의 씨앗이 지금처럼 극단적인 일에까지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세일린은 여전히 트라하의 말에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제가 어떻게 해서 세계 곳곳의 음지에서 그토록 많은 밑작업들을 수행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녀가 뒤를 봐주며 제게 도움을 제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들이었습니다. 덕분에 나는 지금의 계획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황태자와 황후의 눈이 마주쳤다. 알렉시스의 자색 눈은 쓰라림, 슬픔, 그리고 의혹으로, 황후의 푸른색 눈동자는 여전히 그 의미를 모를 감정으로 젖어들었다. 이윽고 황후가 처음으로 입을 열어 증언을 시작했다.

 

 

“나는 ‘균형’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자각했습니다.”

 

 

차분하고 이성적이며 흔들림이 없이 분명한 어조였다.

 

 

“세계와 세계의 배후에는 여러 종류의 권세들이 공존하며 그 가운데는 양팔 저울의 추와 같은 균형이 존재합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존재하며, 오른쪽 날개가 존재하면 왼쪽 날개가 존재하죠. 자유를 추구하는 자들이 있는 가하면 전통을 지키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저와 황제 폐하, 그리고 여기 있는 트라하와 그의 동료들, 내 가문과 브리튼의 유서 깊은 가문들, 곧 우리 세대의 사람들은 그 균형 가운데서 질서를 유지하던 축이었습니다.”

 

 

세일린의 말대로 몇십 년 전만 해도 세상은 촘촘한 균형의 퍼즐 속에서 젠가 블록과 같이 아슬아슬한 틀을 유지하였다. 지구라는 행성 전체를 두 개의 날개가 양분하였다. 동방에는 러시아와 유라시아 대륙을 주축으로 연방이 왼쪽 날개의 기치를 내세워 좌정하였으며, 서방에는 유럽과 신대륙과 아프리카를 축으로 제국이 오른쪽 날개를 담당하였다.

 

 

제국 안에서도 한때 공화파의 입김이 상당하여 전통 세력과 적절한 균형을 이루었고 또 실제로 혜성 같이 나타난 디에고와 그의 동료들이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브라이틀란트 가문과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하는가 하면, 보이지 않는 음지에는 이신론, 신비주의, 가톨릭, 카발라, 힐렐 숭배를 따르는 이들이 존재했다. 후자는 전자 속에 녹아들어 스스로를 위장하였다. 그들의 권세는 적지 않았고 인재와 자원의 총량으로 비교한다면 양지의 무리에 충분히 맞먹을 수 있었다.

 

 

요컨대 알렉시스 이전의 세계에서는 브리튼이 절대적 위치에 있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들도, 이슬람도, 교황청도, 그리고 두로와 에돔의 후손들도, 어느 쪽도 브라이틀란트 가문 홀로는 완전히 감당하기 어려운, 벅찬 상대들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브리튼 황실을 제거하기도 어려웠기에 힘의 균형은 그런대로 잘 유지되었다.

 

 

그러나.

 

 

“황태자 전하께서 이 세상에 데뷔하기 이전까지는 그랬습니다. 빛과 어둠, 자유와 평등, 신본주의와 인본주의의 저울은 어느 쪽으로 기울지 않고 현상유지를 이루었죠. 그 모든 것을 무너뜨린 장본인이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당신은 너무도 큰 존재감, 현 인류가 감당하기에 너무도 거대한 위인이니까요.”

 

 

황후는 냉정하고 이지적으로, 한 치의 감정도 실지 않고 현실을 진단하였다.

 

 

“당신의 존재는 예지를 벗어나는 격변입니다, 황태자. 인류는 당신을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그대는 타협을 통해 공존하는 것이 아닌, 자신과 다른 영적 기류를 모두 말살하여 사라지게 할 위인입니다.”

 

 

알렉시스가 경영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세계의 돈과 권력의 중심축은 여전히 음지의 권세에 있었다. 그랬거늘, 커버넌트 그룹이 창립되고 전 세계의 새로운 젊은 인재의 99% 이상이 황태자의 기치 아래 모이면서 한 순간에 모든 것이 역전되었다. 자본의 95% 이상이 황태자의 영향권 아래 놓였고 그 많은 양이 새로이 배분되어 다른 곳에 흘러들었다.

 

 

경제 질서의 재배치, 화폐의 개혁, 경제력의 옮겨짐, 지역 간의 건강한 균형적 발전, 이 모든 흐름이 건강한 것이긴 했으나 동시에 혁명적인 것이기도 했다. 알폰스와 그 동생으로부터 살아남았던 과거의 기득권이 근 20년 사이에 거의 모든 주권을 잃어버린 것은 순전히 알렉시스 한 명의 탓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한 역사의 왼쪽 날개를 영원히 꺾어버린 주체도 어떤 의미에서는 황태자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라고는 하나 정말로 결정적인 순간에 젊은 세대의 영웅들을 규합해 브리튼을 구해낸 건 알렉시스였다. 사상조작병기를 공략한 것도, 세 명의 적국 출신 마스터를 회유하여 연방 멸망을 앞당긴 것도 모두 그였다.

 

 

그리고 그는 이제 세 축의 플랫폼마저 완성하여 문명 그 자체를 혁명적으로 재건하려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세계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의 잔당도, 에돔의 가짜 유대인들도, 두로의 영적 후손들도, 교황청과 유력 종교들도, 그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되리라. 이미 이슬람은 그렇게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제는 알렉시스가 남긴 안배들로 말미암아 여섯 대조직마저 해체되고 분해될 위기에 놓였다.

 

 

이런 자가 아직 41세에 불과하고 인간의 수명의 두 배를 살 수 있으니 장차 최소한 120년은 그의 치하를 감당해야 한다. 그때까지 알렉시스의 뜻에 합하지 않은 반기독교적 세력과 세속 세력이 이 세상에 발을 붙일 수 있을까?

 

 

세일린은 이것이 정상적인 흐름이 아니라고 판단한 셈이다.

 

 

“황태자께서는 위대한 사람이지만, 이 세상은 초인에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더욱이 빛과 어둠의 균형이 깨어져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은, 그리고 앞으로 남을 브리튼 제국은 균형의 시대로 회귀해야 합니다. 더는 그대를 섬기지 않고 따르지 않는 토대가 회복되어야만 그 작업이 선행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렇기에 이자와의 결탁을 허락한 것입니다. 트라하는 이 사명을 마지막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떠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에 당신과 나 역시 동승해야 합니다.”

 

 

알렉시스는 형언하기 힘든 복잡한 괴로움 속에서 거듭 침묵하였다. 그는 그녀의 지적 중 모든 부분이 틀린 것은 아님을 인지했다.

 

 

“한 가지만 더 질문하고 싶습니다.”

 

 

고통 속에서 알렉시스는 최대한 의연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트라하가 제 어머니에 대해 언급한 말이 진실입니까?”

 

 

바로 그 찰나에, 아주 빠르게 세일린의 안면근육 위로 흔들림이 지나갔다. 그녀의 감정의 색채가 무엇인지는 포착하기도 해석하기도 어려웠다.

 

 

“그 부분에 대해서만 해명을 부탁드립니다.”

 

 

당당하게 자신의 사상을 자백하던 세일린이 어쩐 일인지 대답을 망설였다. 그러자 그녀 옆의 트라하가 대신 답했다.

 

 

“제가 말씀드리죠, 알렉시스님.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황후 전하?”

 

 

세일린은 침묵의 긍정으로 트라하에게 응수하였다.

 

 

“고맙습니다.”

 

 

알렉시스는 분노조차 없는 망연한 심정으로 차분히 답변을 기다렸다.

 

 

“당신의 어머니, 이본 하이신스 크롬벨. 그녀는 부모를 잃은 고아 출신으로 후원자들에 의해 양육된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신은 전혀 알지 못했겠지만, 그녀를 후원한 이들의 배후에는 우리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처음부터 우리의 품에서 길러진 우리의 도구였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대목은 더욱 가관이었다. 세일린은 여전히 아무 말도 반박하지 않은 채 트라하가 계속 말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녀가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우리는 그대의 어머니를 알폰스 황태자에게 보내어 그의 마음을 얻도록 유도하였습니다. 기특하게도 그녀는 왕자와 사랑에 빠졌고 왕자 역시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겼죠. 덕분에 우리는 처음으로 황실의 가장 심장부에, 그것도 차기 황제가 될 이에게 우리의 스파이를 심어넣는 데 성공했습니다. 적어도 초반에는 말이죠.”

 

 

한 단어 한 단어를 듣는 와중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늘 의연했던 그의 머리가 도화지처럼 하얗게 되었다. 거짓말이라고 믿고 치우고 싶었다. 그러나 기억 속에 남아있던 어머니에 대한 의혹과 궁금증들, 그 단서들이 퍼즐처럼 맞춰지며 무언가가 풀리는 듯한 해소감이 들었다. 이해되지 않던 많은 부분들이 설명되었다.

 

 

“알렉시스님, 당신은 바로 그런 여인의 아들인 것입니다. 절반은 언약의 가문의, 나머지 절반은 우리의 피를 보유한 셈이죠. 아시겠습니까? 이 몸을 정죄했던 당신의 말이 그대의 어머니에게도 동일한 잣대가 되어 적용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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