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성자들의 세계 : 심연 파괴자 |83회 경쟁자 |
작가 : PeaceTiger | 등록일 2025.11.19 | 회차평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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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24년 전, 헌터들이 세상에 데뷔하였다.
이미 7년의 끔찍한 세월을 거치는 와중에 인류의 3분의 1은 증발하였고 사회의 전반이 무너져 내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가 임박했다. 세계 정부는 붕괴 위기를 눈앞에 두었다. 형태만이라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은 별수 없이 열 개의 행정 권역으로 지배력을 쪼개었다. 헬게이트들이 육 대륙 전반에 출몰하여 모든 기반을 부수는 마당에 도저히 바다를 가로지르는 통합된 통제력을 행사할 여력이 없었다.
바로 이런 절호의 타이밍을 귀신처럼 포착하고 놓치지 않은 헌터들이었다. 그들은 사실 3~4년 전쯤에 미리 전투에 뛰어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 나섰다면 세계 정부의 존속을 돕는 소비품으로 전락했겠지. 반대로 만일 좀 더 늦게 나섰다면 완전한 무정부 상태가 임했을 테니 사회 자체가 무너져 인류의 종말이 확정되었을 것이다.
헌터들은 일부러 힘을 숨겼고 자신들의 힘이 안정화되지 않은 것처럼 연기했다. 그렇게 시간을 끈 뒤 헌터들은 정치적으로 가장 이용해 먹기 좋은 적기라고 판단된 때에 실전용으로 완성된 ‘안티-게이팅 파워’를 드러냈다.
세계 정부로서는 울며 겨자 먹기 격으로 헌터들에게 농락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로서는 헬게이트나 어비씨언들에 대응할 수단이 전무했기에 안티-게이팅 파워가 완성되기를 기다려야만 했고, 헌터들은 임의로 자기 능력을 숨기거나 공개할 수 있었기에 주도권은 헌터들에 있었다.
이런 식으로 헌터들이 한 마음으로 연합하여 정치적 흥정을 효과적으로 해낼 수 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 분명 그들을 지도하는 강력한 구심점이 있었다. 원래는 세계 정부가 헌터들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웠던 그들 내부의 지도자들, 이들이 되레 막대한 지도력을 확보함으로써 헌터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가 되었다. 대놓고 세계 정부에 반목하지는 않으나 그들과 줄다리기하여 원하는 것을 서서히 취할 줄 아는, 대단히 영악한 지휘관들이었다.
당시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연령대에 속했던 이 네 명의 젊은 남성은 능력 면에서나 지혜 면에서나 당대 헌터들 중에서 최고 수준이었다. 처음부터 가장 좋은 그릇을 지녔으며 태생부터 안정적으로 빚어진 실험체였고 모든 인체 실험에 우수한 성과를 보여준 완성작들이었다. 그들은 예비품으로 존재하던 시절부터 사회성과 영악한 두뇌를 바탕으로 상부의 신임을 얻었고 이를 자신의 권력 기반을 창조해 낼 기회로 삼았다.
최초의 1세대 실험체이자 모든 세대의 실험체 생존자들을 대표하는 리더들, 세계 정부는 임의로 이들에게 알파부터 델타까지 실험체 번호를 부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이후로도 자신만의 이름을 별도로 만들지 않았다. 헌터들이 어느 정도 권익을 쟁취한 뒤로 대부분 자신의 출신 민족의 언어대로 이름을 지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알파, 베타, 감마, 델타는 헬게이트와 헌터들의 최초 충돌 때 동료 헌터들을 지휘한 사령관들이었다. 그들의 효과적인 지도 덕에 헌터의 인명 피해는 최소화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아직 헌터웨폰의 보급이 절대적으로 빈약했으며 엘릭서도 부재했고 안티-게이팅 파워를 효과적으로 운용하는 기술과 지식도 부족했다. 그런 상황이기에 지도자의 지혜는 더욱더 중요했다.
세계 정부의 열 권역은 처음에는 이렇게 여겼다. 네 명의 수장들이 저 번견들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다스리도록 도와줄 매개 장치가 되리라. 그러나 이것은 완벽한 오판이었다. 네 수장은 은밀하게 헌터들의 권익을 확장하고자 했고 자신들의 유리한 위치를 요긴하게 활용할 줄 알았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헌터들이 전력상으로 거의 토벌이 불가능한 위태로운 전장에 뛰어들도록 강요를 받았다. 세계 정부 측에서도 당근과 채찍을 겸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헌터의 통제가 어려우리라고 여겼던 모양이다. 헬게이트들이 급격히 진화하며 약진하던 상황이었고 헌터 전력을 대거 소모하면 추후 인류의 존속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 눈에 훤했다.
헌터 측의 반발과 태업이 거세지자 세계 정부 측은 하는 수 없이 헌터들의 수장들을 대표로 세워 거래를 시도했다. 여러 가지 권익 조항이 계약에 포함되었고 이를 일종의 서류로 인봉하였다. 헌터들과 정부 사이의 첫 공식 조약이었다.
기적적으로 헌터 수장들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것도 기적적으로 높은 생환율을 유지한 채로. 그러나 힘써 수고한 헌터들에게 돌아온 것은 배신이었다. 갑의 위치에 있던 정부는 약속 이행을 거절하며 입을 싹 씻었다. 세계 정부의 전신인 제3제국이 인류를 약탈해 온 방식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 이후에 줄곧 쇄도한 불법적인 쿠데타의 연속을 생각한다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다. 이것이 헌터들과 정부의 역학 관계에 변곡점이 발생한 첫 번째 계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헌터들과의 조약을 정부가 파기하자마자 기괴한 현상이 벌어졌다. 조약 직후에 헌터들이 토벌해 놓은 헬게이트들이 정확히 같은 형태와 배치를 유지한 채 부활하기 시작했다. 오대양 육대주 전반에 토벌 지역이 포함되었고 그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이 같은 패턴으로 재발하였다. 마치 힘겹게 수술로 제거한 암세포 조직이 느닷없이 몸속에서 다시 생성되는 것과 같은, 지극히 어처구니없는 이변이었다.
한 번은 우연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후로도 크건 작건 세계 정부 측이 헌터 집단과의 공식적 조약을 위반할 때마다 이와 비슷한 현상이 발생했다. 마치 언약에 대한 불성실한 태도를 징벌하기 위해서 우주 그 자체가 페널티를 발동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헬게이트들이 헌터들의 편이 되어준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헬게이트들과 그 파생물들은 헌터들을 증오했고 원수처럼 행동했다. 또한 헌터들 스스로 이런 일을 벌인 것일 리도 없었다. 그들 역시 힘겹게 목숨 걸고 싸운 결과물이 무너지는 것을 원치는 않았으니까.
여하튼 이런 일이 반복을 통해 귀납적으로 어떤 명제를 증명하게 되었다. 헌터들의 기묘한 이능력의 기반에는 어떤 ‘언약적인 요소’가 배후로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헌터들 자신도 그 원리는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그 언약적 메커니즘은 매우 확실하게 작동하는 실존적 실체이며 이를 가볍게 여기면 대가가 따른다. 인간들의 경제가 안정적으로 돌아가려면 ‘화폐’에 임의로 부여된 사회적 약속과 합의를 존중하겠다는 결의와 강제성이 필요하듯, 헌터들의 힘을 인류가 이용하기 위해서는 동일한 류의 ‘합의’를 존중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세계 정부는 더 이상 헌터들과의 약속을 그 어떤 것이건 가볍게 여길 수 없게 되었다.
헌터 수장들은 이를 기회로 사용하였다. 그들은 전력을 숨김으로써 공급을 조절하는 전략을 취했다. 실제로는 헌터들이 우세에 있음에도 헬게이트에 비해 열세에 놓인 것처럼 위장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정보의 비대칭성이 있는 상황에서는 세계 정부 측이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그들로서는 자기들의 안위가 걸린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강압이 통하지 않는다면 원치 않더라도 대화와 타협에 나설 수밖에 없다. 바로 이 타협의 장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취해내리라.
이 모략은 목줄 잡힌 개들인 헌터들로서는 최선의 필승법이었다. 헌터 수장뿐 아니라 후대의 지도자 격 헌터들도 이를 그대로 답습했다. 현재의 젊은 지도자 세대인 4세대에 이르기까지도.
*
어느 대도시의 높은 빌딩.
한 젊은이가 생기 없는 도시 풍경에 시선을 고정한 채 벽에 몸을 기댄 자세로 휴식을 취하였다. 금발에 가까운 갈색 머리, 현장에서 뛰는 전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곱상하게 잘생긴 얼굴, 반대로 탄탄하게 다져진 다부지고 건장한 체형, 매우 매력적인 사나이였다. 그에게서는 오만함이 은은히 녹아있는 아우라가 나왔다.
이 혹독하고 차가운 세상 속에서 자신의 힘으로 밑바닥에서부터 최정상 계층에 올라온 자답게 그의 자신감 가득한 표정은 그의 억센 자아를 원형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발레리안.”
청년이 서 있는 발코니 쪽으로 한 인영이 접근했다. 자신을 부르는 중후한 목소리에 발레리안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입가에 피식 미소가 걸렸다. 그는 몸을 곧게 세우더니 가볍게 목을 굽혀 예를 표했다.
“여어, 아버지.”
상대는 커다란 근육질 체구의 중년 남성로 네 명의 최고 수장 중 하나인 감마였다. 그와 발레리안은 공식적으로 부자(父子) 관계였으나 피는 섞이지 않았다. 말하자면 입양 관계라 볼 수 있겠다. 발레리안은 감마 수장의 공식적인 가족이자 가장 뛰어난 부관이며 최고로 신임하는 측근으로 정치적인 계승을 이룰 후계자였다.
“업무는 잘 마치셨고요?”
“덕분에. 너도 수고가 많구나.”
“아무렴요.”
발레리안의 어깨 위에 양아버지는 손을 얹어 신뢰를 표했다. 두 사람은 여러모로 뜻이 잘 맞았다. 마치 델타와 그가 거둔 라이텔바흐가 합이 잘 맞는 것처럼. 하지만 감마와 발레리안은 그 이상으로 긴밀했는데 둘은 정치적인 뜻과 방법론에 있어서도 잘 연합되었다.
대체로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며 정부에 대한 대응에 미온적인 경향성이 있는 알파 수장과 베타 수장과는 달리, 감마와 델타는 적극적이었으며 어느 정도의 야심과 방향성을 갖고 행동했다. 다만 그 목표 지점은 약간 달랐다. 감마는 세계 정부의 붕괴가 아닌, 그들 내부로의 침투를 꾀했다. 전복이 아니라 진지전을 통해 서서히 내부를 잠식하고, 선거 및 권력투쟁 및 권모술수를 동원하여 정부의 많은 부분을 자신들의 것으로 가져온 뒤, 종국에는 주도권을 끌어당겨 온다. 이것이 그가 추구하는 바였고 이는 발레리안의 사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반대로 델타는 더 근본적인 해결에 관심이 있었다. 세계 정부가 비록 그 극악무도한 Third Reich와 동일하지는 않으며 몇 차례의 쿠데타, 정권교체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 사상적 뿌리는 달라지지 않았다. 첫 단추를 잘못 세워 만들어진 괴이체이며 그 부패한 병폐는 청산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누군가는 이 문제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해야 하리라.
라이텔바흐를 거둔 것도 이런 뜻이 조금 반영되었는지 모른다. 델타는 은연중에 세계 정부의 해체라는 미래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노골적으로 이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몰래 그 소망을 위한 포석들을 마련했을 뿐. 그의 양아들 격인 라이텔바흐는 여기서 더 나아가 더 급진적이고 공격적인 노선을 취했다. 발레리안이 내부에서부터 권력을 얻어 권역을 하나하나 취하여 세계 정부라는 전신(前身)을 자신을 위한 새로운 비전의 터로 개조할 뜻을 품었다면, 라이텔바흐는 정말로 때가 이르면 혁명을 일으켜 모든 것을 부수고 다시 만들 기세였다.
“아버지, 북쪽 탑이 은폐되었습니다.”
“나도 확인했다. 그래, 네 생각은 어떻더냐.”
“두려움도 없잖아 있겠지만, 그보다는 정찰 목적이 크리라고 봅니다.”
시베리아 전체를 침식하던 흉흉한 10km 높이의 탑이 하루아침에 흔적도 남기지 않고 자취를 감췄다. 아마 세 개의 동급 구조물이 파괴된 것을 의식하고 나온 반응이겠지만, 헬게이트답지 않은 행동 양상인지라 은근히 거슬렸다.
“무리해서 색출하려면 에너지 소모가 상당하겠군.”
“그렇긴 해도 만약을 대비해 최대한 좌표 범위를 좁혀야 한다고 판단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전력을 수색에 쏟는 사이에 다음 웨이브(헬게이트의 전지구적 대량 출몰을 뜻하는 헌터 용어)가 발생한다면?”
감마의 지적대로 최근 헬게이트 발생 패턴에 불확정성이 증가했다. 이유는 대강 짐작은 가지만 확증은 없다. 그나마 라이텔바흐만이 근접한 정답에 가까이 다가갔을 뿐이다.
“라이텔바흐 그 아이의 협력 없이도 우리가 다음 웨이브에 대한 예보를 작성할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발레리안의 미간에 묘하게 주름이 지어졌다.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곧 비슷한 수준의 예견력을 지닌 시스템을 자체적으로 구축할 수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려무나. 아무리 우리의 원본이라지만 언제까지고 그 청년에게만 의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네, 아버지.”
감마는 이어서 발레리안에게 부탁을 한 가지 제안했다.
“네 의견대로 북쪽 탑에 대해서 우리도 나름의 수색을 시작해야겠구나. 네가 나서서 맡아줄 수 있겠니?”
“알겠습니다. 아버지. 맡겨주시지요.”
“그래, SS 랭크 헌터 다섯을 붙여주마. 준비되는 대로 시베리아 지역으로 출정하거라.”
“괜찮습니다. 저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자신만만하게 사양하는 발레리안.
“혹여 탑의 주인이라도 조우한다면 아무리 너라도 다칠 수 있다.”
“염려 마시지요. 최종 침식 모드라면 모를까, 은폐 모드의 탑이라면 외부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의 출력이 현저히 낮습니다. 만에 하나의 상황이 임하면 우리 측에서도 지원군을 소환하면 그만입니다.”
“알겠다. 정부 측과 기업들과는 내가 잘 이야기하마.”
감마의 명령을 수락한 발레리안은 자택으로 귀환하여 몸을 씻은 뒤 침대에 몸을 뉘었다. 아마 다른 수장들 측에서도 북쪽 탑의 수색대를 파견하리라. 하지만 그 과정에서 다른 세력과의 이런저런 알력 다툼은 피할 수 없겠지. 정부 측과 가장 능수능란하게 소통하는 쪽은 감마 수장이니 아마도 자신이 가장 일찍 도착할 수 있으리라.
“그 재수 없는 친구의 얼굴을 보게 되려나.”
만약 델타 수장이 누군가를 보낸다면 그것은 라이텔바흐 본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좋든 싫든 그자와는 현장에서 협력하게 될 확률이 커진 셈이다. 라이텔바흐를 향해 복잡한 양가감정을 지닌 발레리안으로서는 불쾌감과 기대감이 동시에 일었다.
이상하게도 항상 그자를 향해서만은 지고 싶지 않은 오기가 들었다. 현재 공식적으로는 힘을 숨기긴 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이미 오래전에 수장들을 앞질러 안티-게이팅 파워, 예측력, 종합 전투력 면에서 압도적 우위를 차지한 발레리안이었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넘어서지 못하는 높은 장벽이 라이텔바흐였다. 그러니 늘 신경 쓰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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